한줄 詩

비보호좌회전 - 복효근

마루안 2022. 1. 11. 22:05

 

 

비보호좌회전 - 복효근


알아서 가라는 뜻일 게다

보호해주지 않을 테니
책임지지 않을 테니
니 인생 니가 알아서 살라는 뜻

겁박이거나 책임회피거나
시험의 기미가 농후하다

이 땅에서 왼쪽은 언제나 위험한 곳
숟가락을 왼손으로 잡아들면 대가리부터 쥐어박혔다

반대차선에서 멀리 한 대 다가오는데 망설이자니
뒤차가 경적을 울려댄다

이건 자율의 뜻이라고
직진신호에도 좌회전할 수 있으니 허용의 뜻이라고
왜 매사 못 믿고 주저하느냐 한말씀하시는 것 같다

자율과 허용이 갖고 있는 몇 개의 함정을 나는 안다
직진신호에서 좌회전하다가 골로 간 사람 더러 있다

노조에 가입했다가 나는 좌빨 소리도 들었고
짤릴 뻔도 하였으니
외야의 좌익수마저도 불안해 보인다

어쩌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뒤로
저 애매한 시그널 앞에서
겁 많은 이 작자는 잠시 자기검열 중이시다


*시집/ 예를 들어 무당거미/ 현대시학사



 

 

 

그도 나처럼 - 복효근


심고 가꾸고 꽃을 좋아하는 내가
꽃이 많이 핀 집을 지날 때면
그 꽃을 심고 가꾼 그 사람이 궁금해진다 

그도 나처럼
눈물이 많고 가끔 거짓말을 하고
때론 돈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도 하고
가끔 예쁜 여자 생각도 하고
야한 영화를 찾아보기도 하며
전봇대 옆에 침을 뱉기도 하고
아는 것도 없으면서 괜히 알고나 있는 것처럼 으스대기도 하며
남 흉도 보고 욕도 할 것이다 

꽃이 많이 핀 집 앞을 지날 때면
꽃을 하나도 가꾸지 않은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사람을 떠올리며 

꽃에 의탁하여 조금은 아름답고 싶은 그가
나와 함께 한없이
가엾기도 하고 턱없이 눈물겹기도 하여
오래 발길을 멈추곤 하는 것이다

 

 

 

 

# 복효근 시인은 1962년 전북 남원 출생으로 전북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1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 <따뜻한 외면>, <꽃 아닌 것 없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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