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대화 - 김진규

마루안 2022. 1. 11. 21:57

 

 

대화 - 김진규


메마른 나무옹이에 새 한 마리가 구겨져 있다
다물어지지 않는 부리 위를 기어다니는 어두운 벌레들
작은 구멍에 다 들어가지 않는 꺾인 날개가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들의 그림자를 쓰다듬고 있다


누군가가 억지로 밀어 넣은 새의 몸을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았던 것들의 속을 채워보기 위해
아귀가 맞지 않는 열쇠를 한 번 밀어 넣어 보듯이
혼자 날아가지도 못할 말들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둥근 머리통을 한참 보다가 눈이 마주친다
이쪽의 눈과 저쪽에 있는 새의 눈이 마주치자
여태껏 맞아본 적 없는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머리통이 간지러워져서
나도 어딘가 머리를 드밀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방에서 방으로 옮겨갈 때의 걸음을 생각해보니
나는 언제나 이곳과 저곳의 국경을 넘는 사람인 거 같아
누워 있는 사람의 말을 대신 전할 때
구겨진 새의 몸을 손으로 감싸서 누구한테 내밀듯
나도 어떤 말인지 모를 말들을 했던 것 같아

새의 부리가 날 보고 웅얼거리는 것 같아서
내 귀가 어쩌면, 파닥거리다가 날아갈 것 같아서
나무옹이를 나뭇가지로 쑤신다
좀 더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라고

삼키지 못할 것들을 밀어 넣듯이 밀어 넣는다

 

 

*시집/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 여우난골

 

 

 

 

 

 

역할 - 김진규

 

 

장기자랑 연습이 한창일 때

너는 손자국이 가득한 거울 벽에 이름을 쓴다

만지지 마시오가 무색할 만큼

거울은 온통 누군가의 손으로 가득하고

 

낡은 마루에서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면

시끄럽게 돌아가는 선풍기

커튼 사이로 뜨거운 햇빛

 

배역을 정하는 일은 선생님의 몫이라

너는 가만히 기다린다

항상 배역들은 어두운 장막 뒤에서 나타나니까

너도 언젠가 등장하기 위해 기다린다

 

혹시 저는 나쁜 역할인가요?

너는 어둠 속에서 묻고 싶었지만

무대는 침묵 뒤에 시작하는 일이니까

묻는 대신 숨죽이고 기다린다

하지만 속으로 다짐한다

 

제가 나쁜 역할이라면, 전 평생 등장하지 않을래요

 

선생님은 너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이건 연습일 뿐이란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렴

 

무대는 종종 분주하고 종종 조용하다

 

이상하게도 연습이 끝날 때까지

선생님은 너를 부르지 않는다

가만히 기다리면 될까 봐, 가만히 기다린 너에게

선생님은 얼굴을 가린 채

웃는 것 같은, 우는 것 같은 소릴 낸다

 

마치 너에게 나쁜 역할을 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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