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발 시림과 치 떨림 - 최준

마루안 2022. 1. 7. 22:52

 

 

발 시림과 치 떨림 - 최준


네 살을 기억한다면
아흔네 살을 기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첫사랑이 아프다면
마지막 사랑이 안 아플 리 없다

언덕에는 바람집이 있고
집주인인 바람의 발가락을 주무르는 하녀 안마사
나무가 있고

바람과 나무 사이를 통과하는 사람이 있다
발 시림과 치 떨림

그것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지

네 살의 바람과
아흔네 살의 나무가

왜 함께 첫사랑을 아파하는지
마지막 사랑을 끝내 기다리는지

바람은 치를 떨고
나무는 발이 시리고

 

*시집/ 칸트의 산책로/ 황금알

 

 

 

 

 

 

슬로비디오 - 최준


겨울 강가를 걷다가 보았다
머리 위 버드나무에서 날개 퍼덕이는
새 한 마리
앙상한 나뭇가지가 된 발목이 묶여
어디로도 날아가지 못하는
검은 비닐봉지

아, 알겠다 지난여름 한 때
강물이 그 높이로 흘러갔던 것
상류 어디쯤에서
행로 잃고 물살에 떠밀려오던 저 새를
강이 나무에게로 되돌려주었던 것
내가 지나왔던 언덕을 다 쌓아 올려도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높이에다
한 마리 새를 부려놓고 떠났던 것

그러니까 저 새는
이 겨울과 봄, 그리고 다시 여름이 올 때까지
저렇게 날개 퍼덕이고 있겠다
그러다가 강물이 작년의 수위를 회복하는 날
비로소 하류로 날아갈 수 있겠다 가서는
다시 돌아올 수 없겠다

먼 산 백설이 눈부신 오후

오늘은 할머니의 스물네 번째 기일(忌日)이다
영정을 들고
상여보다 먼저 얼음 언 강을 건너갔던
흑백 사진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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