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들판에서 - 박남원
이승에서 살다 살다 해탈까진 못하더라도
먼지 때 묻은 마음밭 열심히 쟁기질하여
갈고 닦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눈 내려 수심 깊은 들길 한줄기.
우물물 길어 올리듯 세상 하나 길어 올리며
결국, 수많은 사람 중에
그대에게 가는 길.
가도 가도 길 아닌 길 위에서
길조차 눈이 되어 흩날리는데,
그대는 어느 심연의 바닷가에서
눈 내리듯 어디쯤 오고 있는가.
*시집/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도서출판 b
소한 추위 - 박남원
소한 추위에도 인부들은
인력사무실 기름 난롯가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피곤함과 초조함이 날실처럼 교차하는 이른 새벽.
얼룩진 페인트 벽 위로 흐릿한 형광 불빛은 밤 거미처럼 기어 다니고
연장 가방에 담긴 하루치의 연명은 한겨울 날파리처럼 가볍다.
기온은 벌써 영하 십몇 도를 오르내리고
일거리는 이미 오래전에 끊겨 이제 남은 것은 견디는 일뿐.
실내까지 기어들어 온 영하의 기온은 불청객처럼 사타구니로 연신 파고든다.
흙 묻은 겨울 잠바에 두 손을 찔러 넣고 습관처럼
혹은, 체념처럼 농담 몇 마디 내뱉고 나면
달랑거리는 주머니 속 동전 몇 닢이 덩달아 잠시 키득거린다.
시간이 흘러 기어이 날은 밝아
몇몇은 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또 몇은 PC방이나 소줏집을 찾는다.
힘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사내의 등을 슬쩍,
싸하게 스치는 바람소리.
남은 이들은 조금 더 자리를 지켜보지만
삶은 이내 짐승처럼 달려와
내장 깊숙이 끝내 집 한 채 짓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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