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절망을 견디는 법 - 김명기 보증 서 준 친구가 야반도주를 하고 그 빚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구경해 본 적도 없는 큰 빚이 너무 억울해 배를 내밀어 보았지만 보증서에 핏자국처럼 선명한 날인이 말라 갈수록 점점 더 단단하고 큰 빚쟁이가 될 뿐이었다 통장에서 빚이 빠져나가는 날이면 세상 있는 모든 욕을 끌고 와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억울한 마음이 짓무르고 삶이 수척해졌지만 신기하게 빚은 점점 야위어 갔다 몇 해 동안 빚을 다 갚고 나니 그제야 도망간 친구의 안부가 궁금했다 더 이상 빚이 빠져나가지 않는 통장과 세상 모든 욕과 저주는 할 일을 잃었다 더는 만날 일 없을 테지만 한동안 나는 네게 보내는 욕설과 저주의 힘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다 이제 나는 원래 그렇게 살던 사람 같다 어느 ..

한줄 詩 2022.02.18

밥집에서 - 이현조

밥집에서 - 이현조 곤드레밥집에서 차림표를 보던 아내가 어수리가 뭐예요 주인에게 묻는다 나물 중에 최고의 나물이죠 우문에 현답이다 주는 것만 먹다가 먹고 싶은 것만 먹는다 맛난 것만 먹다가 몸에 좋다는 것만 먹는다 나물 중에 최고라는 말에 생전 처음인 어수리돌솥밥을 주문한다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어머 이걸 어떻게 다 먹지 너스레를 떤다 당뇨와 심근경색을 앓던 아버지를 심장마비로 여의고 당뇨와 합병증을 앓는 엄마를 치매로 요양원에 모시고 중년의 나이에 깜박이는 기억력과 머리 어깨 무릎 발 허리 통증을 달고 사니 생긴 버릇이다 기왕이면 몸에 좋은 것이 최고여 천식으로 호흡기를 달고 살던 서방을 보내고 무릎 수술하고도 걷는 게 힘든 장모님 아픔으로 얼룩져본 사람만 할 수 있는 당부 자꾸만 배가 볼록해지는 딸..

한줄 詩 2022.02.17

집으로 가는 길 - 오광석

집으로 가는 길 - 오광석 해가 미처 떠나지 못한 독산동 거리는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공장 건물 뒤로 연붉은 석양이 칠해졌다 몰려나오는 사람들이 순례자들처럼 식당가로 걸으며 성스러운 풍경화가 그려졌다 그가 그림 속에서 서성였다 검푸른 점퍼에 손을 끼운 채 한 식당 앞에 박혔다 기계의 내일을 위해 윤활유를 부어 주는 일은 늘 그의 몸에도 적용시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항상 출근하는 길보다 짧았다 얼큰하고 경쾌한 귀가가 끝나고 좁은 원룸 속에서 지친 몸을 뉘었다 누워서 바라보는 원룸 창문은 커다란 캔버스 끈끈한 유화 같았다 그림 속에서 돌아온 그는 가위로 달을 잘라 반만 걸어 놓았다 나머지 반은 잘게 부숴 별 알갱이로 만들었다 어두운 거리 사방으로 달았더니 별 빛나는 밤거리가 되었다 거리에서 그는 늘 고..

한줄 詩 2022.02.16

지구에서 만났다 - 류흔

지구에서 만났다 - 류흔 나는 지구에 온 사람 지구에 와서 동사무소에 등록을 했고 지구에서 아내를 만났다 지구에 와서 종일 중얼거리는 비를 만났으며 지구에 와서야 말없는 돌과 그보다 신중한 바위를 만났다 지구에 와서는 만나는 것들의 연속 목청 큰 천둥과 가시 공을 나에게 던지는 너도밤나무를 만났다 등을 둥글게 말아 엎드려뻗친 후 폭포 위에서 발광하는 무지개와 나처럼 지구에 온 사람 몇을 은밀히 만났다 많은 별 중에 내가 떠나온 별이 밤새 저렇게 울어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요즘 아내는 나의 정체를 눈치챈 듯하다 저녁에 자세히 씻지 않았으며 돌아누워 새벽까지 정숙하다 그러나 나는 예서 사람이 된 사람 지구에서 잔뼈가 굵은 아내를 위해 나는 기꺼이 체류를 결심했다 *시집/ 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 달아..

한줄 詩 2022.02.16

불편한 관계 - 최규환

불편한 관계 - 최규환 신형 휴대폰을 쓰게 되었다 손가락에 마비가 올 정도로 연습을 해도 세상의 편의를 따라가지 못했다 글로벌 뱅킹으로 가입해 외국인으로 살 뻔도 했다 다음 생은 집 나간 아내가 뜬금없는 소식을 전해오거나 헤어지고 돌아오는 딸의 울먹임에 어쩔 줄 모르는 공중전화로 살고 싶었다 다음날도 그런 생각이 지워지질 않았다 버릇에 길들여지다 보면 습관이 되는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는 몰라도 다행스럽게 그때까진 이렇게 살아도 될 듯싶지만 안과 바깥 사이 그 너머를 꿈꾸는 덜떨어진 멍청이로 사는 게 좋아서 마음만으로 사는 일이 힘든 오후 세상을 앉히지 않은 오랜 누각처럼 둥둥 떠 있다가 네모진 무게 안으로 나를 넣어두려는 미련일지라도 어느 날 흐르는 강물의 찬찬한 넉살로 남고 싶어 행여, 라는 말에 ..

한줄 詩 2022.02.15

굴뚝새의 겨울 - 이우근

굴뚝새의 겨울 - 이우근 살아가는 한해 한해가 늘 겨울이었다, 뜨겁고 서러웠다 폭염이었다 여름이 오히려 추웠다 목도리인 양 구름이 부축해 주었다 소나기는 면도칼이었지, 아마 사는 이치가 극과 극에 맞닿아 그것이 음과 양의 스파크가 되어 에너지가 되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질기고 약해도 핏줄이 아님이 없으니 당한다고 뭉개지지 않으니 개똥밭에 굴러도 더욱 개똥이 되어 거름이 되고 흔적이 되어 뒷날 꽃잎이 되고 별이 될지 누가 알리, 파닥이며, 인간의 겨울을 견딘다. *시집/ 빛 바른 외곽/ 도서출판 선 고속도로 1톤 트럭들 - 이우근 죽어라 달리는 미끈한 차들 속에서도 제법 잘 달리는 작은 트럭들 보고 있으면 즐거워라 배추나 양파 마늘 기타 등등 양(量)으로 뭉쳐야 돈 되는 거 잔뜩 싣고 가끔 돼지나 소도 ..

한줄 詩 2022.02.15

주문진, 조금 먼 곳 - 심재휘

주문진, 조금 먼 곳 - 심재휘 강릉여고 근처에 모여 동기들이 자취나 하숙을 할 때 그녀는 이른 아침 시외버스를 타고 매일 통학을 했다 시내의 머스마들이 주문진 출신을 두고 나릿가라고 놀리던 날이 있었다 강릉과 주문진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이 세월을 따라 어떤 곳은 더 멀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곳은 가까워져기도 했는데 명주군 주문진읍이 지금은 강릉시 주문진읍이 되어서 닿을 듯 닿지 않던 조금 먼 곳이 사라져버렸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은 아주 먼 곳 조금은 멀고 조금만 가까워서 닿을 수 없는 곳 머리에서 바다 냄새가 나던 그 여고생은 말 한마디 못 붙여본 그녀는 가물거리는 그날의 주문진 조금 먼 곳이고 먼 곳과 가까운 곳만 남은 이제는 조금 먼 사랑은 사라졌다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

한줄 詩 2022.02.12

비행기가 자꾸 같이 살자고 하는데 - 김륭

비행기가 자꾸 같이 살자고 하는데 - 김륭 없는 것이다 하늘은, .....그렇게 생각하니까 혼자 사는 것이다 죽은 줄도 모르는 것이다 몇 달 후 혹은 몇 년 후 어쩌다 발견해 줄 사람은 있겠지만 죽은 사람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여야 한다지만 죽은 사람마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혼자 논다 가끔씩 배달되는 자연 한 박스를 열면 나오는 멸종된 새가 같이 놀자고 떼를 쓰기도 하지만 혼자는 기어코 없는 것이다 밤이 없어서 달과 별을 만들 수 없고 낮이 없어 거울조차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이 되기 위해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인 것이다. 문득 하늘을 조금 남겨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나 하면서 혼자 사는 것이다 침대에 누워 본다 저런, 모기가 비행기 흉내를 내고 있다 ......쯧쯧 ..

한줄 詩 2022.02.11

표류하는 독백 - 강재남

표류하는 독백 - 강재남 저녁이 늦게 와서 기다리는 일밖에 할 줄 모르고 저녁이 늦게 와서 저녁 곁에서 훌쩍 커버릴 것 같았다 담장에 기댄 해바라기는 비밀스러웠다 입술을 깨물어도 터져 나오는 씨앗의 저녁 해바라기의 말을 삼킨 나는 담장으로 스며들고 싶었다 물기 없이 늙고 싶었다 저녁이 늦게 와서 내 말은 먼 곳으로 가지 못하고 아직 쓰지 못한 문장이 무거웠다 생의 촉수는 무거운 침묵으로 뿌리내리고 내가 나를 알아볼 때까지 등을 쓸어안아야 했다 꽃잎 떨어지는 소리가 눈동자에서 글썽이는 걸 알았다면 어떤 죄책감도 담아두지 마라 할 걸 말이 말이 아닌 게 되어 돌아왔을 때 여전히 침묵하지 마라 할 걸 저녁은 저녁에게 총구를 겨누고 저녁의 총구에서 검은 꽃이 핀다는 걸 저녁이 늦게 와서 알지 못했다 저녁이 늦게..

한줄 詩 2022.02.10

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하다 - 이기철

안 되는 일이 많아 행복하다 - 이기철 깨진 유리잔은 소리친다, 다시 올 수 없다고 찢긴 페이지는 소리친다 잃어진 제 말의 짝을 찾아 달라고 나는 이 상실을 사랑한다 달리아를 국화꽃으로 만들 순 없다 새의 날개를 빌려 하늘을 날 순 없다 구름을 끌고 와 흰 운동화를 만들 순 없다 씨앗을 묻어 놓았다고 겨울이 안 오는 건 아니다 수심 일만 미터, 마리아나 해구를 장미원으로 만들 순 없다 사과나무가 안 보인다고 밤을 걷어 낼 순 없다 포도덩굴에게 오두막 지붕을 덮지 말라고 부탁할 순 없다 나는 끝내 이 집과 처마와 마당과 울타리와 울타리 아래 핀 물봉숭아를 미워할 순 없다 칫솔을 물고 쳐다본 하늘, 그 푸름을 베어 내 호주머니에 넣을 순 없다 아무리 수리해도 덧나는 들판을 내 손으로 고칠 순 없다 지은 지 ..

한줄 詩 2022.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