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평화주의 - 박소원
남도창도 잘하고 학춤도 잘 추는
아버지는 사시사철 감수성이 풍부한 사내다
날씨에도 매우 민감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중복 더위에
어머니의 턱을 어그러뜨려 놓고
보양식을 사먹으러 읍내로 나갔다
어머니는
얼굴을 가리고 손을 내젓고
나는 집을 뛰쳐나갔다
마을길을 피해 공동묘지 무덤들 사이에
웅크린 채, 별이 뜨는 것을 보았다
엄마가 부르러 오기를 기다리던 나날
겁 없이 잠들어 버리던 나날
무덤에 기대어 잠이 든 나는,
더 이상의 비극을 예상하지 않았다
*시집/ 즐거운 장례/ 곰곰나루
11월 - 박소원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캄캄한 터널을 지나며 손등에 점이 된다
어머니 귓바퀴에는 두 개의 점이
굽은 등에는 일곱 개의 점이 박혀 있다
일 년에 딱 한 번 아버지가 다녀가는 계절
아버지는 운명에 쫓기듯 겨울을 끌고 다녔다
두부를 숭숭 썰어 넣은 김치찌개는
몇 번씩 데워지고 어머니의 손은
홍어무침을 버무리며 수줍게 붉어진다
가족들은 사랑에 서툰 표정을 짓고
밥을 먹고 하나가 되길 원하던
단란한 마음은 징벌처럼 툭툭 갈라진다
먼 곳에서 오는 손님처럼 당신이 다녀간 뒤
흰 손등에 검은 점 하나 반짝거린다
# 박소원 시인은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2004년 <문학선>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만큼 따뜻한 기억이 있을까>, <취호공원에서 쓴 엽서>가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심 - 김기리 (0) | 2022.02.04 |
---|---|
떠나던 날들의 풍경 - 이성배 (0) | 2022.02.03 |
개에게도 있고 사람에게도 있지만 사람들이 더 민감한 - 박찬호 (0) | 2022.02.03 |
소리의 거스러미 - 안태현 (0) | 2022.01.30 |
그런 사람을 누구라고 부르는가 - 이정희 (0) | 2022.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