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소리의 거스러미 - 안태현

마루안 2022. 1. 30. 21:20

 

 

소리의 거스러미 - 안태현


너그러운
순환

노루귀 같은 말들과 우애하며 살자 그랬습니다만
눈을 뜨면
매일 첫 사냥을 나가는 것처럼
맨발의 감촉이 살아납니다

저녁엔 동굴로 돌아와서 불을 켜고 동사들의 야행성을 잠재웁니다

소금쟁이들이 집단 서식하고 있는
두 개의 고원 사이
살얼음 한 장

도무지 녹을 기미가 없는 아래층 남자가 팔팔 끓고
불콰해진 죽창이
어젯밤부터 내 쳐진 엉덩이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여기,
내가 살고 있다는 말보다 그가 살고 있다는 말이 더 실감이 납니다

쏟아져 눈부시게 흩어지는
바둑알 또는
큰 대야에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또는
희고 검은 건반처럼

내가 사랑하는 것들도 높은 파고가 되는
소리의 거스러미

아래는 아래를 쌓고
위는 위를 쌓아서
비무장지대 같은 공중정원이 완성된다고 누가 말했을까요

창밖을 보세요
허공을 켜고 층층이 쌓인 저 거대한 유리의 방들을
저곳에 갇히면
일생 배역이 바뀌지 않습니다
왜 몸과 마음이 견디는지 모르지만
고스란히 되돌려 보내는
보은의 양식으로
나는 융숭하게 아래층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상상인

 

 

 

 

 

 

간 - 안태현


바다를 잃은 물가자미 한 마리 같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침을 꽂고
바닥을 끌어안고 있으니
정말이지 궤짝에 담긴 듯이 얄팍하다

나는 한물간 생물이니
더 흐물거리기 전에 간을 좀 해줘야 하리

복숭아꽃이 진 아가미를 벌려가며
몇 겹의 파도를 뒤집어주고
수압을 낮춰주고
비틀어진 눈을 바로 잡아주고

초인종처럼 옆구리를 몇 번 눌러
제철과 냉동 중
어느 쪽이 더 좋은지 알려주어야 하리

저거 봐라
옆 침상의 물가자미 한 마리도 그렇구나
흰살 깊은 곳 뜨겁게 간이 배는지
끙끙 앓기도 하면서
전화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늘 담백한 맛이라고
어쩐지 사기를 치고 있는 듯한
안녕이라는 이 깜깜한 바다

한 열흘 정도
바닥을 끌어안고 견디다 보면
미간이 편안해지거나
나를 인정하는 고운 마음이 들기도 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