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신을 창조해놓고도 - 김수우

신을 창조해놓고도 - 김수우 청개구리 두마리 내 방에 찾아든 날 우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죽음은 거미를 닮아 어디서나 집을 짓는 중이다 어쩌자고 저 어린 것들 여기 닿았나 화성 탐사를 하듯 망망대해 우주를 건너 내 방으로 들어선 두 마리 초록 등이 선득했다 순수한 초록은 얼마나 날카로운가 들어온 데로 나가겠지, 외면했다 무서웠다 상추도 뜯다가 개밥도 주다가 하루를 지내고 까무라친 한 놈을 모서리에서 발견했다 빗물에 내놓았다 엉금거렸다 괜히 사진첩 들추던 이틀째 한 놈을 찾았다 빗물에 내놓아도 등이 뻣뻣하다 당장 신을 만들었다 신이 필요했다 모래알만 한 기적이 간절했다 기도했다 살려주세요 방 안은 수분 한 방울 없는 광막한 사하라 우물을 숨기지 못한 내 영혼이 바삭거린다 죽음은 원래 알몸이어서 어디서나 집을..

한줄 詩 2022.03.05

어떤 순간 - 최규환

어떤 순간 - 최규환 마음에 몰아치는 날엔 자주 눈에 충혈이 온다 한순간도 존재였던 적이 없다는 생각과 무엇이 되거나 혹은 무엇으로 남아야 되는지가 분명하지 않아 바람 드는 곳에 물든 붉은 목단처럼 나와 만나고 헤어졌던 십수 년의 세월에 관한 영상이 드나들었던 그 길었던 시간이 스친 건 몇 초에 불과하다 충혈이 지속되는 것에 맞춰 허공에 오르는 일처럼 아득함이, 말할 수 없는 의미심장이 들어차는 듯하다 그때보다는 달라진 모습으로 인생은 와 있었고 가늠할 수 없는 방향을 향해 있겠다는 다짐도 하지만 위태로움이었거나 멀리를 향한 마음을 붉게 쳐들고 둥둥 떠다닐 때 소리 밖을 떠나지 못하는 짐승의 울음 하나가 있었다 *시집/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문학의전당 신경통 - 최규환 깨밭 옆집에 살던 여자는 땅주인..

한줄 詩 2022.03.05

봄의 막다른 골목에서 - 류흔

봄의 막다른 골목에서 - 류흔 열이 오른다, 봄이 오는 게지 막다른 곳은 언제나 골목이다 화가 난 개에게 쫓겨 그곳으로 달리다가 문득 생각났다 나는 열이 오르고 개는 지난계절에 갇혀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급진적으로 권태가 왔다 무엇을 해야 하나 저 혐오스러운 개 대신 졸음이 나를 안락사시킬 것 같았다 안락안락 눈꺼풀이 덮치기 전에 서가에 꽂힌 세계문학을 일별했다 개츠비는 여전히 위대했고 앨리스와 함께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가 세 가지 질문을 했으며 베르테르는 늙어서도 슬펐다 자기만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 버지니아 울프처럼 나는 골목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저놈의 개! 동물농장을 읽었는지 지나치게 술을 마시지 않는 개 부릅뜬 채 졸음을 감시하는 개 열이 오른다, 역시 봄이 ..

한줄 詩 2022.03.03

마스크 시대의 성선설 - 전대호

마스크 시대의 성선설 - 전대호 우리는 가려진 부분을 좋게 짐작한다. 적어도 그는, 확실히 그렇다. 마스크 사용이 일상화한 이래로 새삼 깨달은 성선설이라고 하겠는데, 지하철에서 건너편 여자를 무심한 척 주시하며 좋은 기대를 부풀리다가 화들짝 실망하는 경험이 하루에도 여러 번. 어디 마스크 너머 얼굴뿐이랴, 어쩌면 우린 드러난 것보다 가려진 것에서 살아갈 힘을 길어 올리는지도 몰라.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가려진 것들아, 너희가 그를 아무리 배신한다 하여도, 선한 그는 너희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시집/ 지천명의 시간/ 글방과책방 마흔 아홉 - 전대호 1. 굳이 마음먹지 않아도 천문 관찰이 가능하려면 삶이 대단히 단조로워야 한다. 동지를 며칠 앞둔 아침 베란다 블라인드를 젖히다가, 달이 어제보..

한줄 詩 2022.03.03

불면의 쾌락 - 우대식

불면의 쾌락 - 우대식 불면은 내가 나를 베고 잠든 시간 불면은 잠든 나를 쳐다보는 나 잠, 늪으로 한없이 걸어야 하는 수행 무언가 나를 절간의 목어처럼 두드리고 있다 잠과 비(非) 잠 사이를 오가는 리듬 소리 소속 불허, 구걸로 점철된 몽환의 떠돌이로 하얀 바다에 이른다 더러 외할머니 같은 반가운 사람을 만나 화투를 치며 낄낄대다 지낼 만하시냐고 묻다가 화면이 꺼지면 할머니하고 소리를 치다가 또다시 어두운 길을 걷는다 밤이여 어둠이여 짝사랑이여 문득 나는 꺼지지 않는 불의 신도였나 생각한다 사막의 제단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불의 잔을 모래밭으로 집어던진다 모래 유전(油田)으로 불은 번져가고 신(神)도 잃고 잠도 잃고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차라리 죄인으로 벌을 받아야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고향의 수양버들 ..

한줄 詩 2022.03.02

식스맨은 중독성이 강하다 - 서화성

식스맨은 중독성이 강하다 - 서화성 그 거리를 지나간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거리에서 이방인들의 야유와 웃음소리에서, 그렇게 구인광고는 직설적이다 체중감량에 성공해야 한다, 는 그 몸은 낙타구멍을 찾는 광고에 부적합하며 다이어트는 고소하고 달콤한 유혹에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인생의 담보는 한창 때가 매력적이지, 그렇지. 맞아, 우리는 영원한 식스맨이야 주어진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뛴다는 그는, 공간을 초월하지만 어느 곳에서 어느 누구에게 치명타를 날려야 할지, 제한된 시간에서 투입된다 한 시즌에 최고의 식스맨으로 뽑혔다면 후보 중에서 후보인 셈이지 그나마 다행이지. 그런데 말이야, 한 계단씩 올라설 때마다 적체야 언제 퇴물이 되어 바람에 휙 사라질지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그렇게 살아가게 될지, 그때까..

한줄 詩 2022.03.01

북극성이 사라진 섬 - 이정희

북극성이 사라진 섬 - 이정희 서울역, 폐선 한 척 소주병에 묶여 있다 부력을 놓치고 기우뚱 균형을 잃어 허겁지겁 말뚝에 매어졌다 섬과 섬 사이 잔잔한 수면에 햇살이 앉았다 가고 말라가는 바다의 기억이 폐유처럼 캄캄하다 밤마다 높아지는 문턱들, 동전 몇 개 흩어져 있다 닻을 내리고 꼼짝 않고 누웠는데 익숙한 파도 소리가 쟁쟁하다 방죽 긴 의자에 악몽의 냄새가 뿌리내린다 고집스레 돌아갈 바다만 기다리고 있는데 자꾸만 발을 묶는 것들 따뜻한 거실과 된장 냄새나는 식탁이 그립다 종아리 시린 바닷바람에 몸을 움츠린다 바닷새는 종종걸음 치며 섬으로 돌아간다 거친 물살 맞으며 두려움 없이 많은 해협을 향해했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물결이 폐선을 흔든다 앰뷸런스 붉은빛이 빠르게 돌아간다 노숙의 섬이 가라앉는다 *..

한줄 詩 2022.03.01

흑백 무덤 - 김륭

흑백 무덤 - 김륭 뇌를 개처럼 부려 심장까지 내려가 보는 날이 있다. 나는 아이가 된다, 무덤을 보면 뭔가 모자라게 늙었던 내가 꽉 차오르는 느낌 미친 듯이 나는, 나를 완전히 믿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벼운 한숨과 깊은 농담을 나누며 지나가는 바람마저 가만히 노루 똥처럼 그냥 옆에 앉히면 보인다. 기억이 몸을 앞질러 가서 지은 집, 뒤돌아보면 심장과 함께 씹어 먹고 싶은 혀, ..... 무릎, 그리고 빌어먹을 나이 같은 것 그러니까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치고 가는 기억이 있다. 나는 모르는 척한다. 그것은 정말 모른다는 말이 파 놓은 무덤, 개를 뇌처럼 부려 오래전에 찢긴 눈꺼풀이라도 가져온다. 고작 일 년에 두어 번 찾아뵙는 아버지, 당신 유골이 담긴 작은 항아리가 관상용 화분처럼 보일 ..

한줄 詩 2022.02.28

아버지의 호야등 - 김용태

아버지의 호야등 - 김용태 철없던 때, 결국 막차를 놓쳤다 잔별들 바람에 쓸리어 가자 잇대어 비가 내렸다 쉼 없이 걸었다 낮에도 혼자 넘기 꺼려하는 진고개 노망든 귀머거리 여자가 얼어 죽었던 움막이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고 금방이라도 뒷덜미를 낚아 챌 것만 같은 카랑카랑한 욕지거리와 함께 굶은 짐승처럼 오도카니 도사리고 있었다 몇 해 전인가, 아랫말 춘식아재가 술에 취해 돌아오던 길에 도깨비에 밤새 씨름을 하다 살아 왔다던 애장터, 칠흙 같은 이 소나무 숲이 끝나면 그 곳인데 무사히 지날 수 있을까 그 때 불 빛 오, 멀리서 흔들거리며 다가오는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우골탑 신화(牛骨塔 神話) - 김용태 젊은 아버지께선 정남향, 볕 잘 드는 곳에 그분의 거처를 마련하시고 식구를 늘리..

한줄 詩 2022.02.28

늦은 흔적 - 우혁

늦은 흔적 - 우혁 너를 밟았다 그리고 내 손에 너의 발자국이 묻어 있음을 뒤늦게 알아챈다 손이 시렸고, 또 누군가의 화초처럼 난 늙는다 답이 정해진 질문이 아니기에 끝없이 되물어보는 버릇 언제나 당신은 두 번씩 답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구름이 발자국이며, 하늘이라 이름 붙인 어느 우주는 이토록 동그랗다 어떻게 하든 난 길을 따라갈 것이었으면 굳이 길을 길이라 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시집/ 오늘은 밤이 온다/ 삶창 버릇 - 우혁 늙지 마라 했던 짧은 충고는 손등 위에 주름으로 남았다 솔직히 거짓말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거짓말들은 의도와 상관없이 재림했다 오우 너는 얼마나 거룩했지 오늘, 지금, 그대로 늙지 마라 했던 충고는 알고 보면 고백이었다 예를 들면 자랑은 아니지만이라고 시작한 말들은 필히..

한줄 詩 2022.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