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태엽 감는 아버지 - 안은숙

마루안 2022. 2. 4. 22:03

 

 

태엽 감는 아버지 - 안은숙


어느 나라를 사랑한 적은 없지만
그리워한 적은 있다
그럴 때 나는 태엽 감는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태엽을 감다 보면
자꾸 무더운 여름이 왔고
아버지는 노을처럼 녹슬어갔다

엄마의 방은 온통 한쪽으로만 감겨 있었고 늘 열려 있어 좋았다
저녁이면 내 입에선 혓바늘이 돋아 하수구 있는 좁은 마당에 빙글빙글 비행기가 한 방향으로 잘도 돌았다
그 어지러운 기류를 타고
나팔꽃이 피어났다

장난감은 고장이 나는 것이 아니라 싫증이 나는 거라 생각했다 눈이 따가울 때 어느 먼 나라는 가까이 감겨 있었고, 옆집 담 끝에 걸려 있던 파란 감이 서둘러 붉어지면 아버지가 돌아왔다

고봉밥이 올라오고
며칠 동안 대문은 잠기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장난감은 바뀌었지만
아버지, 나는 말하는 장난이 필요해요

주기를 두고
태엽을 풀며 오시는 아버지
아버지는 오래 풀리며 사셨고
나는 너무 감겨서 잘 풀어지지 않는다

아버지가 옆에 있으면 지금도 덥다
아버지 몸속엔
오래 풀리는 무더운 여름이 있다

 

 

*시집/ 지나간 월요일쯤의 날씨입니다/ 여우난골

 

 

 

 

 

 

옮겨가는 기억 - 안은숙


느티나무 아래, 아이와 놀았다
옮겨가는 것은 몇 평 햇볕이 아니라 그늘이었다
뒤뚱거리는 보폭으로 느티나무는
더운 여름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울었고
떠올린 기억은 웃는다
기억은 넘어질 수도 있고 울 수도 있다
꽃들이 무릎을 깨고 붉은색을 흘릴 수도 있다

누군가 부른다면 이미 나를 지나친 이름
부를 때마다 뒤돌아 갈 수 없기에
기억은 그쯤에 있는 것이다

엄마의 기억은 아이의 걸음에 맞추어 어려지고, 아이의 몸은 커 간다
큰 나무에서 옮겨가던 여름
닮는다는 것은 서로 멀어지려 하기 때문이다
오래 기억하려 하기 때문이다

낯선 계절을 너에게 줄게
낯익은 엄마를 너에게 줄게

오전은 편모슬하 오후는 편부슬하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낯모르는 너의 아이와 놀아주렴

아이의 등으로 자라는 엄마의 시절
그 기억들
천천히 굽어질 관계들
기억은 옮겨가는 것으로 퇴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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