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흔적 - 정덕재

마루안 2022. 2. 5. 19:22

 

 

흔적 - 정덕재

 

 

생애가 끝나기 전에 모든 것을 비운다

 

나이 쉰다섯을 넘은 뒤부터

남아 있는 것을 하나씩 지우기로 결심했다

 

천 권이 넘는 책을 버렸다

기억에 남는 책은 백 권이 되지 않았고

표지를 펼치지 않은 책은

삼백 권이 넘었다

 

열 켤레 신발 중에서

두 켤레만 남긴 결정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양복 열 벌을 버리고

두 벌만 남겼다

하나는 결혼식장

또 하나는 장례식장이다

 

많은 것을 지웠다는 흡족한 마음으로

이삿날 짜장면 먹는 관습처럼

탕수육 한 그릇 앞에 놓고

잔을 기울었다

 

미련을 비우는 게 인생의 명예라고

술 취한 고개를 끄덕이며

불명예스러운 일회용 플라스틱 유산을 남기고 말았다

 

내 생애가 끝나도 흔적은 대대손손

중국집 플라스틱으로 남는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오래된 운동화 - 정덕재

 

 

소풍 가기 이틀 전

부뚜막에 올려놓은 운동화가

오래된 연탄불에 그을려 누렇게 탔다

 

한 켤레의 운동화로

학교에 가고

소풍을 가고

골목길 숨바꼭질을 했고

 

한 켤레의 운동화로

외할머니 집에 가고

구멍가게 문을 두드려

두부를 사 왔고

 

한 켤레의 운동화로

축구공을 찼는데

담장 밖 공을 던져 준

여자 짝꿍의 운동화가

누렇게 그을려 있고

 

환하게

서로 환하게

웃어 준 적 있다

 

 

 

 

# 정덕재 시인은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 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대통령은 굽은 길에 서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