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 정덕재
생애가 끝나기 전에 모든 것을 비운다
나이 쉰다섯을 넘은 뒤부터
남아 있는 것을 하나씩 지우기로 결심했다
천 권이 넘는 책을 버렸다
기억에 남는 책은 백 권이 되지 않았고
표지를 펼치지 않은 책은
삼백 권이 넘었다
열 켤레 신발 중에서
두 켤레만 남긴 결정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양복 열 벌을 버리고
두 벌만 남겼다
하나는 결혼식장
또 하나는 장례식장이다
많은 것을 지웠다는 흡족한 마음으로
이삿날 짜장면 먹는 관습처럼
탕수육 한 그릇 앞에 놓고
잔을 기울었다
미련을 비우는 게 인생의 명예라고
술 취한 고개를 끄덕이며
불명예스러운 일회용 플라스틱 유산을 남기고 말았다
내 생애가 끝나도 흔적은 대대손손
중국집 플라스틱으로 남는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오래된 운동화 - 정덕재
소풍 가기 이틀 전
부뚜막에 올려놓은 운동화가
오래된 연탄불에 그을려 누렇게 탔다
한 켤레의 운동화로
학교에 가고
소풍을 가고
골목길 숨바꼭질을 했고
한 켤레의 운동화로
외할머니 집에 가고
구멍가게 문을 두드려
두부를 사 왔고
한 켤레의 운동화로
축구공을 찼는데
담장 밖 공을 던져 준
여자 짝꿍의 운동화가
누렇게 그을려 있고
환하게
서로 환하게
웃어 준 적 있다
# 정덕재 시인은 199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비데의 꿈은 분수다>, <새벽안개를 파는 편의점>, <나는 고딩 아빠다>,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대통령은 굽은 길에 서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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