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벤치의 혼자 - 박인식

벤치의 혼자 - 박인식 벤치에 혼자 앉아 있다 기다리는 그 무엇은 혼자 온다 하니까 아무도 누구를 기다리느냐 묻지 않는다 무대 위는 줄곧 나 혼자니까 연극 끝날 때까지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온다는 그 무엇은 혼자라도 끝내 오지 않아 아무도 누구를 기다리느냐 묻지 않을 것이니까 막이 내려와야 그 무엇이 혼자 오길 기다리지 않는 혼자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여기 벤치는 거기 조리 있는 벤치와는 달리 부조리 연극의 벤치 막 또한 올라간 적이 없어 아주 내려오지 않을 부조리의 막 연극이 끝난다 해도 나는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니까 *시집/ 내 죽음, 그 뒤/ 여름언덕 고흐가 고갱을 만났을 때 - 박인식 아를르에서 고흐가 고갱을 만났을 때 열다섯의 내가 남태평양 타히티섬에서 고갱을 만나는 밀항을 꿈꿨을 ..

한줄 詩 2022.02.27

심장이 뛰던 시절 - 정덕재

심장이 뛰던 시절 - 정덕재 겨울이 끝나 갈 무렵 바지를 꺼냈고 허리는 두꺼워졌고 종아리는 가늘어져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걷겠다며 마음먹었더니 미처 준비하지 못한 심장은 헉헉댄다 계단을 오르지 않고 가파른 고개를 넘지 않아도 숨이 가빴던 시절이 있었다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의 숨소리와 최루탄 터지는 소리와 흔들리지 말자는 혁명의 노래와 공장 굴뚝의 연기와 갈아엎는 배추밭이 어울려 심장이 뛸 때가 있었다 3층 계단만 올라도 숨이 가쁘다 허리띠 한 칸 때문에 콩당거리는 심장의 체면은 온데간데없다 계단은 높고 박동은 초침보다 빠르다 심장은 왼편에 있지만 반 뼘 정도 좌우로 움직일 때가 있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덧대어진 키스 - 정덕재 안경 쓴 가수 이상우가 '그녀를 만..

한줄 詩 2022.02.26

저물도록 - 박수서

저물도록 - 박수서 사는 일이 스스로 저버린 꽃밭에 앉아 꽃수를 놓거나, 수몰된 가계의 지붕 위를 날아오르는 텃새처럼 이앙기가 삼키고 뱉어버린 모판처럼 남겨진 추억에 우물쭈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련 때문에 운명으로 떠나간 열망 저 편을 일몰이 긋고 간 심장의 붉은 두근거림은 저녁이 오면 해가 지는 일처럼 말없는 풍경이던지, 오래된 애인과 먹는 말 많은 밥상이면 좋겠어 제법 큰 눈이 내렸고 무거워진 가로수 쇠골처럼 내려앉은 나는 바라보는 일보다 지켜보는 일이 한창이야 앞질러 뛰어가는 세월의 넓적다리를 자세히 보면 알잖아 바라보는 눈은 때때로 삶을 짓눌렀던 단단한 근육을 먼저 알아보지만 지켜보는 눈은 오금이 저리도록 기어이 견뎌왔을 힘줄을 읽잖아 하여 지켜보는 눈은 사랑에 더 가까운 생명체야 눈 녹은 후 ..

한줄 詩 2022.02.26

양폭산장 바람 소리 - 김기섭

양폭산장 바람 소리 - 김기섭 물빛 고운 비선대를 떠나 천불(千佛)이 거처한다는 천불동으로 접어들었다. 귀면암을 지나 양폭산장에 도착할 무렵 대청에 낙엽이 다 졌다는 풍문이 들려왔고, 산장 앞 단풍잎들은 눈물겹게 빛났다. 만경대 꼭대기, 새벽부터 비가 뿌렸다. 공친 산행, 어두운 산방에 일없이 둘러앉아 소슬바람에 삐걱거리던 문소리와 떨어지는 단풍잎을 바라보면서 아침부터 술을 마셨다. 낮이 되면서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정현 형이 가수 장사익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별처럼 슬픈 찔레꽃 향기는 골짜기를 떠돌다가 가을비에 젖어 들고 밤새 바람이 세찼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밖을 나서는데 그새 가을이 다 갔는지 지천으로 깔린 붉은 잎을 차마 밟기 어려웠다. *시집/ 달빛 등반/ 솔출판사 꿈꾸는 수렴동 ..

한줄 詩 2022.02.23

덫 - 최백규

덫 - 최백규 밤새 덫에 뭉개져 있던 쥐를 끄집어낸다 손끝에 밴 피비린내가 지워지지 않는다 바람도 죽은 대낮에 커튼을 젖히다 돌아봐도 아무도 없다 암세포만 몸속에서 꾸준히 자라고 있다 빨래를 하고 밥을 차린다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두렵지 않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평생 하청 업체에서 일했다 자존심을 죽이지 못해 늘 순탄치 못했다 용접 불꽃과 부딪치며 살아온 그들은 잘못 접합된 쇠처럼 어긋나 있었다 이제는 잘린 손가락이 약속을 쉽게 꺾어버릴 것 같다던 농담마저 우스워진다 팔에 새긴 이름을 긁적일 때마다 몸에서 고기 타는 냄새가 난다 욕실에서 혼자 등을 밀다 문득 이 계절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거리 나무들도 병을 앓아 꽃에서 고름을 흘릴 것이다 피 흐르는 손목을 쥔 채 덫처럼 아무..

한줄 詩 2022.02.22

불운의 달인 - 이현승

불운의 달인 - 이현승 나는 무례한 사람들의 특징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부끄러움이 많고 사무적이며 세상에는 뭔가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확신이 있다. 어떤 급한 일도 덜 중요한 일로 만드는 능력을 신은 왜 그들에게 주었는지 의문이다. 그들은 늑장 피우지 않지만 서두르지도 않는데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월이 짧은 것이 달력 기술자의 문제가 아니듯 마음을 급하게 먹는다고 해가 빨리 가는 것도 아니며 슬슬 얼굴색이 삭힌 홍어처럼 되어가는 사람 앞에서라면 그들은 한 호흡으로 더 멀리 잠수하는 사람처럼 굴지만 다음 기회란 항상 꽝 뒤에 오는 것이라서 운 나쁜 사람은 철로에서 튄 돌멩이에 눈을 맞은 사람이며 벼랑 말고는 다음이 없어 참기 힘든 사람이다. 우리는 성공이 약속한 대로 찾아오지는 않..

한줄 詩 2022.02.22

견뎌야 희망이다 - 박지영

견뎌야 희망이다 - 박지영 하루 치의 노동이 환전되는 곳 넓은 펜스 안의 마당에서는 풀섶에 떨어진 민들레마저 씨가 되어 높은 고철 담장을 넘기까지 넝마주이와 숨어든 이웃들의 슬픈 이야기들이 거래되는 곳 매일 풀섶에 눕고 둑방 길 아래 개천에 별처럼 숨어 있는 먹이들을 찾아 새들이 훑듯이 아버지가 가난한 삶을 견디는 넝마주이들에게 희망을 나누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집/ 돼지고물상 집 큰딸/ 실천문학사 넝마주이에 대한 애상 - 박지영 매일 마주한 그들의 웃음은 비린내가 났다 잘못된 선택이 인도한 삶과 하루의 고단함 또한 그럴진대 꽃을 볼 여유도 없이 하루 종일 떠돌다 고물을 얻지 못하면 펜스에 마주한 채 오줌을 누고는 했다 지린 펜스를 지나며 꽃들을 보는 우리 남매는 코를 잡고도 꽃을 바라보았다 허기진 그늘..

한줄 詩 2022.02.21

별것도 없는 봄을 기다리다니 - 박찬호

별것도 없는 봄을 기다리다니 - 박찬호 회양목 낮은 줄기 사이로 노란 꽃이 필 날도 이제 멀지 않았어 그때가 되면 봄도 오는 게지 겨우내 남극의 펭귄 떼처럼 서로의 등에 기대어 칼바람을 피하던 회양목은 그래서 항상 무더기로 자라는 게지 외롭지 말라고 낮고 작은 것들은 뭉쳐야 산다고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것들은 스스로 알아서 살아야 한다고 매해가 그렇게 스스럼없이 오고 또 가고 한겨울을 올곧게 이겨 낸 낮은 가지들에게 축복처럼 별빛이 내리는 밤 살아 있으니 보기 좋다 꿋꿋하니 대견하다 아직도 그렇게 함께 의지하니 눈물 난다 조금만 지나면 나아질 게야 이제 상원(上元)도 막 지났으니 정말로 봄도 멀지 않은 게지 그렇게 봄은 올해도 또 오려는 게지 분명 벚꽃이 필 무렵에 조용히 오려는 게야 그러면 분명 나아..

한줄 詩 2022.02.19

혼자 먹는 밥 - 김남권

혼자 먹는 밥 - 김남권 혼자 먹는 밥은 눈물이 절반이다 젓가락질 한 번 할 때마다 마주 앉고 싶은 한 사람을 떠올린다 싱거운 콩나물무침을 밥에 올려놓고 한참을 망설이던 순간 대학로 어느 분식집 귀퉁이에서 떡라면을 사주던 가난한 시절의 한 사람이 떠올랐다 고춧가루를 털어 넣은 겨울 뭇국 한 숟가락 떠먹다가 앙큼하게 순결을 바치고 떠난 고 계집애가 떠올라 목이 메었다 평생 밥을 혼자 먹었지만, 생의 한 마디를 지나서도 여전히 혼자 먹는 밥은 그리움이 절반이다 김치조각 하나에도 왼쪽 가슴이 떨리는데 아직 봄이 오려면 한 달이나 남았는데 선홍빛 진달래 한 송이는 어쩌자고 눈 밑에 피어나 저 홀로 아롱아롱 눈물을 삼키고 있을까 *시집/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시와에세이 페이스메이커 - 김남권 육십 평생을 눈 ..

한줄 詩 2022.02.19

길고양이 - 박숙경

길고양이 - 박숙경 어둠을 사랑한다는 말과 도둑이라는 누명의 말은 왠지 은밀히, 라는 말과 잘 어울리죠 눈물을 사랑해요 심심한 날이면 자음 모음을 허공에 던져 흩어진 낱말을 낚기도 해요 처녀자리에 영역 표시를 하는 건 우리들만은 아니죠 슬퍼질 때는 잘게 다져진 별빛으로 심장 한복판에 눈물의 뼈대를 그려요 본능은 잔인하기도 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잊어버려야 할 것은 기억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유죄라는 붉은 글씨를 가슴에 새기죠 벽과 벽 사이를 사랑해요 그림자들의 수군거림을 엿듣거나 바람의 목격담이 들려오면 우울해져 헛기침이 나요 아무렇게나 흘려놓은 몇 마디와 팽팽해진 밤의 감정이 손을 잡으면 어둠으로 깊어져 눈빛이 흐려져요 안개 같은 사랑을 꿈꿔왔어요 안개는 안개를 외면하지 않아요 나지막이 안개가..

한줄 詩 2022.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