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집 잃은 달팽이 - 박주하

집 잃은 달팽이 - 박주하 너무 멀리 왔다고 말하진 않겠다 두고 온 집을 기억하는 것이 언제나 더 끔찍했으므로 총알처럼 날아다녔던 것이다 목적 없는 탄알처럼 길을 헤매었던 것이다 공중에 몇 채의 집을 날려 보냈으나 생의 곳곳에는 눈물도 더러 있었기에 나는 온전히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달 속에 파도가 있었다 넘실대는 물결은 비밀처럼 달콤했으며 잦은 배고픔도 나의 소관은 아니었다 지상은 눈시린 정면이었으나 그 파도 속엔 망각을 위한 망각이 반듯했다 긴 어둠 속으로 점점 얇아지는 나의 집이 아침마다 태어나는 나를 다시 불러들이진 못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불길함처럼 집이 있던 자리가 계속되어도 이미 마음이 버린 집을 깊이 살았다고는 더더욱 말하지 않겠다 *시집, 숨은 연못, 세계사 감기지 않는 눈 - 박주하 바..

한줄 詩 2018.02.24

바다가 있는 지하실 - 강신애

바다가 있는 지하실 - 강신애 그 바다는 흐르지 않아, 회벽을 붙들고 나지막이 철썩일 뿐 퀴퀴한 동굴 속에 바다라니! 처음엔 수건인 줄 알았지 만지면 손에 푸른곰팡이가 묻어나는 바다는 어둠과 거미줄, 망가진 집기들과 먼지에 찌든 지하실의 햇빛 목마름이 만들어낸 몽상일까 바다를 고정하고 있는 수평선에서 지난여름 백사장 가설무대 색색의 리본을 뭉게뭉게 뽑아내던 마술사의 끝없는 입이 떠올랐지 아니, 바다가 토해낸 거품 속 리본이 마술사의 혀를 끌고 나왔던가 무언가를 정밀히 반추하기엔 진한 하수구 냄새의 지하실 이곳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바다를 나는 네 귀퉁이 접어 가방에 집어넣고픈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른다 지퍼를 열면 왈칵, 쏟아지는 이 신성한 허무를 어떻게 걸어놓을까 수평선이 허물어져 내 방의 너무 많은 ..

한줄 詩 2018.02.23

웃음인지 울음인지 - 박용하

웃음인지 울음인지 - 박용하 태어난 날은 알지만 죽을 날은 언제인지 모르는 알고 보면 누구나 시한부 인생 알 것도 없이 죽을 병이 삶인데 막상 삶이 1년이나 6개월짜리 꼬리표 달면 미운 털 몇이고 다음 세상 식탁에서도 생선가시 발려내며 밥 먹고 싶은 인간 몇일까 나나 내 선배나 내 후배들 만든 몸들 하나 둘 세상 뜨고 상갓집에서 별다른 느낌도 없이 술 먹는다 직장암 수술 받기 위해 어머니 입원한 원자력 병원 엘리베이터에 나보다 한창 새파란 이마 뒤로 머리카락 하나 없는 절대 소녀, 빛이라도 마주 튈라 그저 눈 허공에 깔다 콩나물국밥집에서 특별한 느낌도 없이 아침 먹는다 *시집, 견자, 열림원 성욕 - 박용하 1 수줍음과 난폭함이 늘 양날의 칼처럼 맞대고 있다 평생 동안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며 귀하다고도..

한줄 詩 2018.02.23

곧, 사과 - 서규정

곧, 사과 - 서규정 벌겋게 눈을 떠라, 무덤 속에 들어가면 잠은 실컷 잘 수 있나니 살아 있는 동안 닦고 조이고 기름 쳐라 우리 동네 입구 도서관에 말씀 한 자락이 그럴듯하게 깔렸다 또 그것인가, 공개경쟁, 민족사적 수난과 드난살이를 하던 때를 까맣게 잊고 집단무의식이 끌고 가는 경제만능의, 요지경 속에 뒤처진 빈민들은 어쩌라고 그래 미래는 아무래도 암울해야 미래겠지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갈 곳이 별로 없다면, 별천지를 찾아 가야지 야구장에 들면 열 개 구단의 깃발따라 바람도 따로따로 불어 바람의 바운드를 맞추려다 공을 놓친 수비수들이 겹쳐 나뒹굴며 누워서 걷는 하늘, 영웅도 전설도 보이지 않는 이 시대에 그대들이 영웅들이다 두근두근 혼자 걷는 내 가슴속에 낙원은 운동장보다 별반 크질 않아 곧, 사과 도..

한줄 詩 2018.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