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둠이 사는 이유 - 이창숙

마루안 2018. 2. 24. 20:03



어둠이 사는 이유 - 이창숙



실내등을 끄고 커튼에 깃든 어둠을 반쯤 열면
길모퉁이에 4월 저녁이 돌아와 서 있다
이젠 내게서 칭얼대던 무거운 생각들을 내려놓아야지
혼자서 봄 강을 건널 수 있게
꽃 피울 수 있게
베란다를 보니 지난겨울 얼어죽은 영산홍의
어린 나무가지가 생선 가시처럼 뻗쳐
나를 향해 찌리고 있는 게 아닌가
눈이 아프다
미안해서 자꾸 눈이 아파 온다
피가 엉겨붙은 마른 잎들을
어둠이 안쓰러워 쓰다듬어 준다
어둠에 익숙한 것들은
살아서도 죽음을 들여다 볼 수 있고
죽어서도 삶을 엿볼 수 있다


커튼을 닫는다
가로등 불빛도 새어들지 않게 걸어 잠그고
나를 붙잡고 서 있는 어둠 한 그루
조용히 내 옆에 눕힌다 그리고
오늘도 어렴풋이 거미에게서 듣는다
어둠은 천상을 향한 생의 끝없는 기도라고.



*시집, 아무도 없다, 혜화당








살아가기 8 - 이창숙



(불면을 낚는 거미 보셨나요? 캄캄한 공중에 탱탱한 욕망의 줄을 늘이면 밤마다 누군가의 잠의 중심이 가볍게 조금씩 들어 올려지는 것을요)


부실한 잠까지 이젠 빈 껍데기로 한밤중
혼자 몸 뒤척이는 겨울 바다가 그리워지고
피멍든 하루일수록 낮이 더 어둡다는걸
불켜진 창문 밖 나뭇가지 뼛속을 들여다보고야 알았네
길 건너 십자가 불빛이 세상 티끌 다 태우고 나면
가난한 사람들의 꿈의 지붕이 걸린
끝간데 없는 하늘이 보이고
예수를 닮은 어머니 말씀
먼 하늘가 호수빛으로 서 계신다
가끔씩 그 말씀 아릿하게 슬퍼하다 다시
삶을 다독여보다....


(삶에 덴 손가락으로 구름 헤집으면 내 유년의 달이 뛰쳐나올까 민들레 꽃씨 띄운 달 속에 봄이 오고 있는데, 추억의 집에서 나를 꼭 닮은 아이 하나 걸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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