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틈새의 생 - 김추인

틈새의 생 - 김추인 -모래가 키우는 말 사막에 서면 고향 언덕 같아 주저앉고 싶다 끝도 없는 모랫벌 바람치는 벌판이 내 속만 같아서 그 휑한 가슴 껴안고 싶다 혼자가 아니라도 홀로인 시간 죽을 만큼 쓸쓸해서 눈뜰 씨알조차 없이 마르는 땅 있다 가시풀 음지의 살 틈에 전갈이나 키우는 불모의 땅 있다 사막의 정오 열사뿐인 모래의 불길 속을 막창자 꼬리까지 탱탱한 독을 뻗쳐들고 전갈들이 질주한다 비로소 사막에 길이 난다 누가 알 것인가 내 열두 늑골 뗏장 밑에 엎드려 향방 없는 일상의 사막 가운데로 때없이 날 내달리게 하는 독푸른 전갈 한 마리를 *시집, 모든 하루는 낯설다, 세계사 보증 또는 보류 - 김추인 증을 믿는 사람들에게 실체는 허수아비다 생애의 중요한 일마다 앞에 나서서 콩이다 팥이다 증거하고 보..

한줄 詩 2018.02.18

낯선 곳에서, 낯선 - 김정수

낯선 곳에서, 낯선 - 김정수 내 방 동쪽에 조그만 창문 하나 나 있고 햇살은 물 속의 유리막대처럼 휘어져 들어온다 나도 투명하게 휘어져 있다 늦은 아침 길게 연기를 매단 산 아래의 굴뚝들 집 한 채씩 소유하고 있다 늦게 싹을 틔운 나도 미끈한 굴뚝 소유하고 싶었지만 비탈진 골목 벗어나기도 전에 자빠지곤 했다 산 위에서 시작한 삶은 산 위에 머물렀다 산 아래서 시작한 삶도 한 번 올라오면 물처럼 밑으로 흐를 수 없었다 저기 또, 뿌리 잘린 사람들 무리 지어 올라온다 몇 번 자빠진 후에야 비탈진 길에 익숙해지리라 하늘을 다 가진 창문으로 햇살이 휘어져 들어오고 오늘도 죽어야 산 위에 오르는 무리 속으로 향한다 *시집, 서랍 속의 사막, 리토피아 목수 - 김정수 그는 목수였다. 60평생 60십 채가 훨씬 넘..

한줄 詩 2018.02.18

세상의 모든 옷걸이는 누군가의 배후다 - 정충화

세상의 모든 옷걸이는 누군가의 배후다 - 정충화 모든 옷걸이는 옷을 위한 몸이다 주인을 대신하는 또 다른 몸 육신의 껍데기를 끌어안고 기꺼이 제 몸을 빌려주는 누군가의 대역(代役)이다 철 지난 양복을 걸치고 옷장 속 어둠을 거르거나 젖은 셔츠를 입고 빨랫줄에 매달려 햇볕과 바람의 통로를 지키는 수문장이 되기도 하는 것들 세상의 모든 옷걸이는 누군가의 배후다 나 역시 낡고 찌그러져 가는 한낱 옷걸이일 뿐이다 *시집, 누군가의 배후, 문학의전당 삶과의 불화 - 정충화 홀로 밥 먹을 때가 잦다 마주하는 눈길 없이 마른 밥을 삼킬 때마다 삶의 황폐함을 생각한다 건기의 사막처럼 수분이 바싹 말라버린 박토 내 영지의 척박함은 늘 나를 질리게 한다 한번 끊어져버린 끈은 매듭만으로는 결속력이 약해서 언제고 다시 끊어지..

한줄 詩 2018.02.17

마루 밑 - 허림

마루 밑 - 허림 마루 밑, 누렁이가 새끼 낳으러 들어가기도 하고 쥐약 먹은 누렁이 거품 물고 뻘건 눈 부라리며 서서히 죽어가던 마루 밑, 햇살이 닿지 않아 더 어둡고 서늘하고 왼손잡이 할아버지 꾸불꾸불한 지팡이와 고집 센 검정 소 목덜미에 얹었던 멍에 삐딱하게 떠받고 있는 마루 밑, 허물 같은 생의 거처는 남아있는가 뭉툭한 호미 날이나 부러지고 이 빠진 낫 모질뱅이 숟가락 깨진 대접 볼펜에 끼워 쓰던 몽당연필 눈알 같은 유리구슬 국어 책 겉장으로 접은 딱지 몸통뿐인 기타 무궁화 꽃이 선명한 1원짜리 하얀 동전 어머니한테 대들다가 떨어진 것 같은 단추 빠져 들어간 마루 밑, 먹구렁이 울음 웅숭깊은 어떤 기억 *시집,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황금알 굴뚝 - 허림 마른 연기 피어오르는 굴뚝 보면 왠지 그 ..

한줄 詩 2018.02.17

눈물이 절며 길 떠날 때 - 김이하

눈물이 절며 길 떠날 때 - 김이하 멀어지는구나 아주 오래 전 떠나온 길을 기억으로 더듬어 돌아가는 길 발을 절며 먼 데 보니 느티나무 한 그루 의지가 되네 인생은 두 발로 안 되면 지팡이를 짚고 그도 안 되면 네 발로 그도 안 되면 죽음으로 무슨 말인가를 지껄이다 가는 것 멀어지는구나, 풍경들 옹알이하던 아이가 등에서 내려와 해시계의 그림자처럼 일생을 돌고 어둠에 묻힌 그 하루 자꾸 늦어지는 벽시계에 새 전지를 끼우고 멀어지는 것들의 속도를 재고 있었다 한 방울 남은 눈물이 절며 길 떠날 때 *시집, 눈물에 금이 갔다, 도서출판 도화 눈물에 금이 갔다 - 김이하 남의 집 한 칸을 빌어 십수 년을 살면서 이게 어디냐고 가끔은 걸레질 비질도 했는데 이제는 더러움에 익숙했는지 그게 다 내 살 같다 빠릿빠릿하..

한줄 詩 2018.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