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추억에게 - 정윤천

추억에게 - 정윤천 우리들 여린 발돋음으로 꼰지발을 세우고 거기 이른 저녁별 하나 따 가지고 싶었던 그 봄밤에의 기억, 떠올릴 수 있겠는지요 달마중 핑계로 손잡고 나섰다가 괜한 일로 다투고 왔었던 어떤 일이며 숨바꼭질로 시들해진 해름참이면 영님이네 들집 울타리 바람벽에 기대 서서 먼 산 허리께 걸린 취한 놀빛 속에 취해 우리들 눈길들이 또한 엇비슷한 어지러움 타곤 하였습니다 해 진 언덕 저편으로 겨운 하루나절을 밟고 오시던 우리들 아버지들의 땀내 묻은 머리칼과 무등을 타고 되오던 길에 바라보인 옛집 위의 저문 고적함 너머로 깊어가는 저녁의 연기 그 고운 저물녘에 이제 다시 가볼 수는 없겠지요 살림 났더라는 이야기 언젠가 바람 속으로 언뜻 전해도 전해도 들었습니다만 우리들 잊혀진 날들만큼의 꼭 그만해진 크..

한줄 詩 2018.03.05

어제처럼, 그 어제처럼 - 최준

어제처럼, 그 어제처럼 - 최준 아버지 오월이면 꽃을 심었다 나는 수조에 물을 담아 연신 꽃이 뿌리내릴 흙을 적셔주고 그러다 그 여자아이 놀러오면 함께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 꿈을 꾸었다 늘 그랬다 어제처럼 또 그 어제처럼 세월이 세월을 데리고 가고 아버지 천둥 번개 다 맞으셨다 꽃밭에서 꽃처럼 고민하고 햇빛 그리워하고 땀흘리셨다 내리는 햇빛 다 못 받고 흐르는 땀 닦지 않고 아버지 늘 아프고 수척했던 아버지 꽃과 함께 떠나셨다 그 여자아이 잊혀진 꽃말처럼 떠나갔다 새벽이면 의롭게 죽어가는 꽃밭 가득히 서리 내리고, 떨리는 손으로 꽃씨를 받는다 흔적없이 내리는 궂은 비 다 맞으며 나는 떠날 것들의 길을 열어준다 가을 그 길도 비에 젖고 마르지 않고 *시집, 너 아직 거기서, 도서출판 모모 얼음의 나라 - ..

한줄 詩 2018.03.05

중년을 보다 - 김일태

중년을 보다 - 김일태 싸울 상대가 보인다는 것은 선수가 되었다는 증거다 두 발 들고 항복하는 것처럼 엄살떠는 과장도 필요하다 최후의 항전처럼 작은 일에도 독거품 뻐끔뻐끔 물어야 한다 전진 후퇴 전법은 고전적인 것 좌우로 밟는 노련한 발놀림으로 이념도 유연하게 건너야 한다 들어와 덤빌 테면 덤비라고 기권은 없다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더라도 두려움은 나를 지키는 호위무사라고 내질러야 한다 함부로 건들면 같이 죽는 수 있다고 두 주먹으로 가슴 치며 파이팅 외치는 인파이터 복서 같은 게 같은 중년(中年) *시집, 부처고기, 시학사 녹슨 관계 푸는 법 - 김일태 녹슨 나사같이 해묵은 갈등 섣불리 억지로 풀려 들면 나사처럼 대가리만 부러져 영원히 풀 길 없어지고 말지 사람이나 나사나 주위를 조심조심 두드려 덥혀 있..

한줄 詩 2018.03.05

쉰 살의 맨손체조 - 강형철

쉰 살의 맨손체조 - 강형철 적수공권으로 세상을 사는 일이야 견디면서 어떻게 해왔다지만 쉰 살에 맨손체조는 어찌해볼 수 없는 깜깜 절벽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일은 쉬워도 360도 돌리는 일은 안 된다 팔을 흔드는 일은 쉬워도 동시에 발을 움직이는 동작은 어렵다 습관적으로 숨이야 쉬어왔지만 팔다리를 흔들면서 숨 쉬는 일은 안 된다 쉰 살에는 일들이 팔다리 어깨 발 도처 어디든 눌어붙어 있어서 그 일들에게 눈치가 보여서 맨손체조는 어렵다 단순한 소주잔 꺾기나 일에 눌려 한숨을 쉬는 것은 몰라도, *시집, 환생, 실천문학사 틈 - 강형철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그는 24시간 사우나로 간다 구두를 벗어 번호표를 챙기고 런닝과 팬티를 벗어 옷장에 넣은 뒤 열쇠를 발목에 찬다 샤워를 하고 온탕에 몸을 담갔다가 숯가마로..

한줄 詩 2018.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