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탈취 - 김성규

마루안 2018. 2. 23. 10:23



탈취 - 김성규



냄새가 그를 둘러싸고 냄새의 방에서

그는 떠다닌다 땅속은 언제나

환하게 익은 죽음의 씨방


주둥이를 오물거릴 때마다 피어나는 냄새

까만 눈동자를 굴리는 새끼들은 굶주림에 미쳐 있다

찍찍거리며 각목을 쏠아대는 소리

콩알만한 심장이 뛰는 소리

밤마다 잠들 수 없는 속눈썹을 떨며

하수구에서 하수구를 쏘다닌다

운이 좋아 트럭에 실려 떠난 형제들은

들판에서 어느 항구에서

냄새의 씨앗을 퍼뜨리며 살고 있을 것이다


아무 소식 없으니

상처를 도려낸 과일처럼 기억은

썩어가는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눈에 불을 켠 새끼들은 뛰쳐나가

한번 보면 눈이 멀어버린다는 햇빛 아래

붉고 싱싱한 내장을 널어놓는다

먹음직스런 자신의 냄새를 피워올린다

밤마다 그 냄새를 씻으려 창을 열면

하수구에서 쏟아지는 시큼하고 매운 냄새들

방 안으로 밀려든다 냄새에 떠밀려

천장으로, 내 몸이 둥실 떠올라!


죽음이란 그렇게 흘러오는 것이다

흙탕물에 과일이 뒤엉키듯

저 아래 잠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상한 꽃송이 같은 새끼들을 버려두고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창비








독산동 반지하동굴 유적지 - 김성규



가슴을 풀어헤친 여인,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이,

온몸이 흉터로 덮인 사내

동굴에서 세 구(具)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은 부장품과 함께

바닥의 얼룩과 물을 끌어다 쓴 흔적을 설명하려

삽을 든 인부들 앞에서 웃고 있었다

사방을 널빤지로 막은 동굴에서

앞니 빠진 그릇처럼

햇볕을 받으며 웃고 있는 가족들

기자들이 인화해놓은 사진 속에서

들소와 나무와 강이 새겨진 동굴 속에서

여자는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고

사내는 짐승을 쫓아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으리라

굶주린 새끼를 남겨놓고

온몸의 상처가 사내를 삼킬 때까지

지쳐 동굴로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축 늘어진 젖가슴을 만져보고 빨아보다

동그랗게 눈을 뜬 아기

퍼렇게 변색된 아기의 입술은

사냥용 독화살을 잘못 다루었으리라


입에서 기어다니는 구더기처럼

신문 하단에 조그맣게 실린 기사가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새벽

지금도 발굴을 기다리는 유적들

독산동 반지하동굴에는 인간들이 살고 있었다





*시인의 말


유리창으로 새벽빛이 스미는 것을 본다. 그 빛으로 목욕을 하면 고통이 다 녹아 흐를 것 같은 착각과 함께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묻게 된다. 극도로 피곤하거나 굶주렸을 때 찾아오는 알 수 없는 적의와 지나친 자기비하, 그리고 무기력증, 그 모든 감정들이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향할 때 몇줄의 글을 종이에 적어넣게 된다. 늘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살아온 것 같다. 나의 우유부단함과 나약함을 겪어온 사람들께 안부를 전한다. 창밖에는 아침 햇살이 쏟아진다. 언제 내려놓아야 할지 모르는 짐을 지우는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길, 나의 시가 축복 없는 이 세계에 작은 빛이라도 던져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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