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신천(新川) - 안상학

신천(新川) - 안상학 어둡구나 어둠의 시절과 더불어 썩어 흐르는 신천 우리들의 캄캄한 그리움은 어디로 흐르는 것이냐 강변 언덕배기 포장마차에서 지친 노동의 하루를 달래고 기름때 낀 손을 조아려 담배불을 나누면 우리들의 그리움은 흘러 무엇을 이룬다냐 쓸쓸히 헤어져 돌아와 누운 산동네 하꼬방에 번지는 쥐오줌 애인이 흘리고 간 사랑의 흔적처럼 벽에 거꾸로 매어달린 채 야위어가는 무수한 안개꽃 같은 슬픔의 파편들이 젖은 눈길에 박혀든다, 우리들의 여가는 밥과 잠을 위한 시간일 뿐 밤낮 없이 형광등 불빛 아래 부나비처럼 모여 일만 하는 벌레무리 살아흐른다는 것은 이렇게 서럽기만 한 것이다냐 썩은 물만 흐르는 신천 저 깊은 어둠의 중심을 향하여 슬픔의 젖은 파편들을 뽑아 던진다 파편들은 단단한 돌멩이로 날아가 신..

한줄 詩 2018.02.17

난 좌파가 아니다 - 신현수

난 좌파가 아니다 - 신현수 비 내리는 날 낡은 유모차에 젖은 종이박스 두어 장 싣고 가는 노파를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아프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네온 불 휘황한 신촌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 온몸을 고무로 감고 사람의 숲을 뚫고 천천히 헤엄쳐가는 장애인을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저리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천일 가까이 한뎃잠을 자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을 봐도 이제 그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제초제를 마시고 죽은 농민을 봐도 몸에 불 질러 죽은 농민을 봐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으므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난 좌파가 아니다 *시집, 시간은 사랑이 지나가게 만든다더니, 도서출판 이즘 희미한 옛 세월의 그림자. 4 - 신현수 자기가..

한줄 詩 2018.02.16

흔들리는 풍경 - 장만호

흔들리는 풍경 - 장만호 늦은 밤, 숨죽인 화계사를 건너다 보면 국립재활원의 아이들 서서히 일어나 하나, 둘 셋 손을 잡는다 휠체어를 타거나 지체 부자유한 별들 별들을 이어 별자리를 긋듯 밀거나 당겨주며 수유리의 밤을 온몸의 운동으로 순례한다. 길 밖에 고인 어둠만을 골라 딛으면서 몸이 곧 상처가 되는 삶들을 감행하며 흔들리는 평생(平生)을, 과장도 엄살도 없이 흔들며 간다 그 모습 가축들처럼 쓸쓸해 왜 연약한 짐승들만 겨울잠을 자지 않는지 작은곰자리에서 내려올 눈발을 헤치며, 왜 사람만이 겨울에 크는지, 묻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붕어빵을 입에 물고는 풍경(風磬)처럼 흔들리며 간다 깨어 있으려고 흔들려 깨어 있으려고 *시집, 무서운 속도, 랜덤하우스 수유리(水踰里)에서 - 장만호 함부로 살았다 탕진..

한줄 詩 2018.02.16

잘게 부서지다 - 차영호

잘게 부서지다 - 차영호 머리칼 까만 그믐밤에도 동산 솔숲 아래께가 훤한 것은 새똥처럼 흩뿌려진 추억들이 조곤조곤 부서지고 있기 때문 장대비 멎은 저녁답 끄무레한 벌판을 휙휙 나니는 도깨비불은 누군가를 깊이 연모(戀慕)하는 넋이 누군가를 향하여 부서지는 것 별들도 태초의 어둠덩어리가 잘게 부서진 연유로 반짝거리고 오래 움츠렸던 기다림이 잘게, 잘게 부서질수록 화안해지는 꽃 아가야, 이 저녁 내 얼굴이 환해짐도 먼발치에서 일렁이는 물결에 가슴속 켜켜이 쟁여진 응어리가 푸석푸석 부서져 내리는 까닭이라면 잘게 부서진 것들은 모두 반짝거리고 깊이 모를 사랑은 늘 서늘한 것이로구나 *시집, 애기앉은 부채, 문학의전당 망두석 - 차영호 그 해 눈 속 장고개 외딴 터에 든 밤손님 순경 출신 아부지가 지게꼬리로 오라 ..

한줄 詩 2018.02.15

스물 아홉 살에 - 김경미

스물 아홉 살에 - 김경미 -12월 31일 까닭없이 불안하고 구차스럽고 참담까지 한 이십대가 이제 다신 오지 않으리라 안도하여 나는 오늘 서른이 반갑습니다 누가 내 서른에 혀를 차겠습니까? 때로는 스물 한 살, 어리석어 붙들리는 치기범이 되고 어느날은 아마 새치기꾼을 눈물 나는 국산 극장 앞에서 마흔살의 암표를 사고 있을 겁니다 끝내 평균대 위에서 맘대로 춤추는 선수 그 노련한 삶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무조건 그리 될 줄 알았던 삼십세 새물 먹고 돌아온 고통과 악연과 서로 까닭을 밝히리라 너무나 빨리 되고 싶었던 서른살 시시덕대는 척하면서 울면서도 내 안이 내 밖이 합쳐질 조짐 술렁대는 삼십대를 뒤지며 살게 되겠지요. *시집,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실천문학사 청량리 588번지 - 김경미 그대 몸..

한줄 詩 2018.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