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무화과나무 - 배홍배

무화과나무 - 배홍배 꽃 피워본 적 없는 나무에 일몰 걸릴 때 마른 가지에도 별자리끼리 얽히는, 잎보다 많은 아버지의 밤들은 피어났다 별자리에 숨겨진 운명을 읽어내느라 얼굴 밖까지 흘러내리는 눈, 아버지의 눈물과 마주쳤을 때 모르는 척, 입술부터 붉었다 손바닥 위로 발돋움을 하고 나뭇잎을 닮아가는 손금대로 운명을 기다리는 꿈속 한 자리 고개 저으며 아버지가 올려다보던 높이에서 걸음마 배우고 모르는 척, 입술부터 붉었다 *시집, 바람의 색깔, 시산맥사 고목 - 배홍배 남평역에 저녁이 옵니다 늙은 벚나무에 뚫린 커다란 구멍으로 오래된 저녁은 천천히 옵니다 그 옛날 리어카에 실려나간 사람이 나무 아래서 몸속으로 흘려보냈을 숨 가쁜 하늘도 저 구멍을 지나왔을까요 숨 끝에 밀린 목구멍은 빈 소주병 안에 아직 고여..

한줄 詩 2018.02.21

해변의 묘지 - 김창균

해변의 묘지 - 김창균 나는 거기서 최초의 부드러운 한 사람을 만나는 중이다. 부화 준비를 막 끝낸 알처럼 금이 간 해변의 묘지 한 기 그 벌어진 금 사이로 부는 소금기 밴 바람들. 혹시 저 속에도 저물 대로 저문 생들이 모여 저녁밥을 끓이고 있을까 처녀의 젖가슴처럼 봉긋한 저 속엔 무슨 씨앗이 들어 있어 갈대가 자라고 키 작은 소나무가 자라고 때론 노란 원추리꽃도 피는 것일까. 단 한 번도 세상과 바다 그 어느 쪽도 편애한 적이 없었다는 듯 바다 쪽으로 반 육지 쪽으로 반 귀를 열어 놓고 웅크린 자세로 평생을 앉아 묘지들은 낮게 아주 낮게 중얼거린다. 그 중얼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다 어느새 나는 해변의 무덤 한 기 내 속에 들인다. *시집, 녹슨 지붕에 앉아 빗소리를 듣는다, 세계사 적멸보궁 - 김창..

한줄 詩 2018.02.20

고독사, 혹은 과로사 - 홍신선

고독사, 혹은 과로사 - 홍신선 혼자 오래 견디는 외로움도 너무 지나치면 과로 아닐까 때 이른 소한 추위 속 세상 뜬 독거 할멈, 고독사일까 과로사일까 반쯤 타다 꺼진 연탄 서너 장 나뒹구는 쪽방 앞엔 늙은 한 마리 반려견이 헌 박스나 폐지 틈에 매어있었다는데 판독용 엑스레이 필름처럼 생전엔 비닐가림막 청테이프로 누덕누덕 덧붙인 극빈의 깊숙한 내부나 둘은 사이좋게 들여다 보았다는데 알아듣는 말귀 몇 마디엔 말귀를 뚫어 종신(終身)토록 목줄처럼 서로를 서로에게 걸고 살았다는데 그게 옛 창가(娼街)의 비좁은 골목 맴돌며 낑낑대며 애완용 왕따의 나날들을 헤매던 둘만의 필살기였다는데 혼자 견디는 고독력도 너무 오래 된힘 쓰다보면 못 버텨 낼 과로란 듯 훌훌 털어낸 이제 뭇 지각 모두 꺼버린 주인의 긴 잠속에 끝..

한줄 詩 2018.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