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느낌이 좋은 사람 - 권현형

마루안 2018. 2. 23. 21:39



느낌이 좋은 사람 - 권현형



봄눈은 바라보는 자의 눈동자에 쌓인다
첼로와 하프를 위한 흰 눈의 낙법(落法)
저 장엄한 서사의 주인공은


봄눈 내리듯 깨끗이사라지는 이마


자기 발자국 소리를 천둥처럼 듣는 자
나비, 나비의 흰 망령(亡靈)들


찍히는 자의 혼을 들여다보느라
사진 찍는 데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사진작가의 눈


느낌이 좋은 사람과는 밥을 함께 먹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너의 이마 위에 봄눈이 내린다



*시집, 포옹의 방식, 문예중앙








오래된 사이 - 권현형



바다를 느끼는 카메라 셔터의
신경이 곤두서 있다
바삭 마른 실루엣, 남자가 보인다
11월 모양으로 서서 피사체를 찍는다
뒤로 물러났다가 앞으로 다가갔다가
모래 바닥에 한쪽 뺨을 대고
모로 눕는다 연인처럼 나란히 누워
눈을 들여다보며 셔터를 누른다
그는 한쪽 어깨로 모래사장을,
해변의 그늘을 다 짊어지고 있다
고행이라면 고행이다
나도 옆으로 몸을 기울여 돌이킬 수 없는
관계처럼 바다를 바라본다 낯설다 본 적 없는
얼굴이다 바다의 뺨에 내 뺨을 대고
나란히 누워 다시 들여다봐야겠다
당신, 고뇌의 모래사장을 내 한쪽 어깨로
온전히 받아 짊어지고 다시 안아봐야겠다
오래된 신(神)의 눈을 지겹도록
들여다봐야겠다 서로 낯설어질 때까지
서로 지극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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