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집 잃은 달팽이 - 박주하

마루안 2018. 2. 24. 19:50

 

 

집 잃은 달팽이 - 박주하


너무 멀리 왔다고 말하진 않겠다
두고 온 집을 기억하는 것이
언제나 더 끔찍했으므로
총알처럼 날아다녔던 것이다
목적 없는 탄알처럼
길을 헤매었던 것이다
공중에 몇 채의 집을 날려 보냈으나
생의 곳곳에는 눈물도 더러 있었기에
나는 온전히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달 속에 파도가 있었다
넘실대는 물결은 비밀처럼 달콤했으며
잦은 배고픔도 나의 소관은 아니었다
지상은 눈시린 정면이었으나
그 파도 속엔 망각을 위한 망각이 반듯했다
긴 어둠 속으로 점점 얇아지는 나의 집이
아침마다 태어나는 나를 다시 불러들이진 못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불길함처럼
집이 있던 자리가 계속되어도
이미 마음이 버린 집을
깊이 살았다고는 더더욱 말하지 않겠다


*시집, 숨은 연못, 세계사

 

 

 

 

 

 

감기지 않는 눈 - 박주하

 

 

바라던 바, 그 노인에게

이 언덕의 길들은 삶의 형식이었다

살아야 한다고 살아서 걸어 나가자며

옹색한 담장들은 너나없이 틈을 비집고

서로의 목덜미를 움켜쥐는데

세워둔 마음이 그를 따라나서지 못했다

 

막다른 골목마다

까지밥 같은 등불 피워놓고

흩어진 식솔을 기다리며

홍반처럼 앓던 시간들 다 지나간다

그 등불 죄다 꺼져버린 후엔

바람은 대처 어느 쪽에서 불어오는 건가

하루살이들만 풍문을 지우느라 분주하다

시름이 소죽처럼 끓어 넘쳐도

세파에 몸을 실은 씨앗들은 영영 기별이 없는데

어서 돌아오렴, 나의 주름들아

오늘도 그의 눈은 차마 감겨지지 않는다

 

늙고 병 깊은 마음 한 톨을

간신히 찍어 올린 노란 가로등 하나가

창틈으로 그의 시간을 들여다보고 있다

 

 

 

 

# 박주하 시인은 경남 합천 출생으로 숭의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6년 <불교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항생제를 먹는 오후>, <숨은 연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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