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도망간 여자 붙잡는 법 - 류근

마루안 2018. 2. 23. 21:57



도망간 여자 붙잡는 법 - 류근



도망간 여자가 아직 지구 안에 머물고 있다면
그녀를 붙잡는 것은 아주 쉬운 일
우선 몸의 부피부터 부풀려야 한다
태양계보다 커야 한다
지구 밖으로 물러나 좀 살펴보다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지구의 속도를 가볍게 제압한 후
태양 가까이 가져가서 자세히 관찰하도록 한다
그래도 도망간 그녀는 쉽게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도망간 여자가 채석장에서 돌을 깨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집어등 밝힌 어선을 타고 오징어를 잡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강물과 바닷물을 비워낸다
너무 예리하지 않은 칼로 지구의 껍데기를 벗겨낸다
아, 지붕들만 살짝 벗겨내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핀셋으로 남자들을 골라낸다
좀 작업이 더딜 것 같으면 도처에 싸움을 일으키면 된다
남자들은, 어쨌든 무엇을 위해서든 뛰쳐나가지 않고선
배겨내지 못할 테니까 그게 남자들이 주로 하는 일이니까
이번엔 동네 구멍가게든 백화점이든 모든 상점마다
폭탄 세일을 벌이도록 한다 도망간 여자가
설마 그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구두를 고르고 있진 않을 테니까
홍당무와 감자의 무게를 달고 있진 않을 테니까
이제 좀 정리가 됐는가
그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준다
한사코 귀를 막고 다시 도망가는 여자가 있다면
그녀를 주시하라 그녀는 아직도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고
내가 되었든 당신이 되었든 결코 다시 듣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까
도망간 여자가 아직 지구 안에 머물고 있다면
그녀를 붙잡는 것은 아주 쉬운 일
그러나 도망간 여자를 붙잡는 일은 너무나 어리석어서
제발 그만두라고 말리고 싶다
그건 지구를 괴롭히는 일이니까
태양계를 비좁게 만드는 일이니까



*류근 시집, 상처적 체질, 문학과지성








極地(극지) - 류근



살아오는 동안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거의 언제나
일방적으로 버림받는 존재였다
내가 미처 준비하기 전에
결별의 1초 후를 예비하기 전에
다들 떠나버렸다


사람을 만나면 술을 마셨다
술자리가 끝나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가야 할 사람들은 늘 먼저 일어서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끝까지 잘 참아주었다


그러나 마침내 술자리가 끝났을 때
결국 취한 나를 데리고 어느 바닥에든 데려가
잠재우고 있는 것은 나였다


더 갈 데 없는 혼자였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가 있는 지하실 - 강신애  (0) 2018.02.23
웃음인지 울음인지 - 박용하  (0) 2018.02.23
느낌이 좋은 사람 - 권현형  (0) 2018.02.23
탈취 - 김성규  (0) 2018.02.23
곧, 사과 - 서규정  (0) 2018.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