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곧, 사과 - 서규정

마루안 2018. 2. 22. 21:13

 

 

곧, 사과 - 서규정


벌겋게 눈을 떠라, 무덤 속에 들어가면 잠은 실컷 잘 수 있나니
살아 있는 동안 닦고 조이고 기름 쳐라
우리 동네 입구 도서관에 말씀 한 자락이 그럴듯하게 깔렸다
또 그것인가, 공개경쟁, 민족사적 수난과
드난살이를 하던 때를 까맣게 잊고 집단무의식이 끌고 가는
경제만능의, 요지경 속에 뒤처진 빈민들은 어쩌라고
그래 미래는 아무래도 암울해야 미래겠지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갈 곳이 별로 없다면, 별천지를 찾아 가야지
야구장에 들면 열 개 구단의 깃발따라 바람도 따로따로 불어
바람의 바운드를 맞추려다 공을 놓친 수비수들이 겹쳐 나뒹굴며
누워서 걷는 하늘,
영웅도 전설도 보이지 않는 이 시대에 그대들이 영웅들이다
두근두근 혼자 걷는 내 가슴속에 낙원은 운동장보다 별반 크질 않아

곧, 사과

도무지 받아낼 수 없도록 쏟아지는 별빛 속에선
새삼스러울 것 없이 줍는 것이 곧, 새로운 축복이다
야구공만 한 사과 한 알이 뚝 떨어져 지축을 흔들 때
손에 쏙 들어온 야구공, 아니 사과를 다시 집어 던지는 걸 보면서
횡설수설 던진 말을 정리하려면
어라하! 생떼 같은 빈민들의 목숨보다, 변명은 좀 더 길어야 할 것이다


*시집, 다다, 산지니

 

 

 

 



파란 대문 - 서규정


가버린 것들은 다만 돌아오지 않을 뿐이다
길가에 콩 팥도, 콩 날 때 콩 나고 팥 날 때 팥 나던 것을
해지고 구멍 난 런닝구 같은 마음이 벗겨지질 않아
시방 이 몸통 밀룽밀룽 흔들어 어느 난전에나 가 닿겠는가
구르고 기어서 구례 화엄사 문턱까지 왔을 때는
누구에겐가 펼쳐 보이려다 금방 덮고 싶은 욕망이란 그 보따리
땅에서 주워 든 건 땅에 돌려주고
허공에서 잡아든 건 허공에 돌려주라고
대나무는 속을 다 비우고 저리 곧추섰다
장대비 한 울음을 소록소록 껴안아 받는 것을

사람아 그대 흘러가 돌아오지 않을 뿐이라도
지리산 계곡 물을 받아 돌리던 바위도
물의 숨을 골라주려고 파란 이끼를 저토록 오래 품었다
천년에 한번 만난 꽃잎도 그다음 천년에 두어 피어나라고
멀리멀리 띄워 보냈을 것이다




# 서규정 시인은 1949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야의 정거장>, <하체의 고향>, <직녀에게>, <겨울 수선화>, <참 잘 익은 무릎>,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다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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