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다가 있는 지하실 - 강신애

마루안 2018. 2. 23. 22:52

 

 

바다가 있는 지하실 - 강신애


그 바다는 흐르지 않아,
회벽을 붙들고 나지막이 철썩일 뿐

퀴퀴한 동굴 속에 바다라니!
처음엔 수건인 줄 알았지
만지면 손에 푸른곰팡이가 묻어나는

바다는
어둠과 거미줄, 망가진 집기들과
먼지에 찌든 지하실의 햇빛 목마름이 만들어낸 몽상일까

바다를 고정하고 있는 수평선에서
지난여름 백사장 가설무대
색색의 리본을
뭉게뭉게 뽑아내던 마술사의 끝없는 입이 떠올랐지
아니, 바다가 토해낸 거품 속 리본이 마술사의 혀를 끌고 나왔던가

무언가를 정밀히 반추하기엔
진한 하수구 냄새의 지하실

이곳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바다를
나는 네 귀퉁이 접어 가방에 집어넣고픈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른다

지퍼를 열면
왈칵, 쏟아지는
이 신성한 허무를 어떻게 걸어놓을까

수평선이 허물어져
내 방의 너무 많은 지하실에 스며
바다는 흔적도 없어질 테니


*시집, 당신을 꺼내도 되겠습니까, 문학의전당

 

 




줄타기 광대의 전설 - 강신애


까마득한 곳에서
자동차가 오후의 타이프가 숨 가쁘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감미로워지는 높이

하늘 전체가 흔들거려
무심한 발놀림으로 눌러둘 수 있을까
무심하게 줄 위에 누워 출렁이는 초원을 꿈꿀 수 있을까

환영처럼 주저앉을
그라운드제로, 빌딩 사이 묶인
한 가닥 햇빛에 의지해 건너야 할 그리움이 있다

첫 걸음을 떼자,

불과 먼지와 돌
켜켜이 덮인 중력이 녹아내리고
인간이 사라진 뼈의 대칭만 남아
무심코 올려다본 행인들 어, 입을 틀어막는다

부르르 떠는 기류의 각도에 날개를 맞추며, 반짝이며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고
천상의 거울 반대편으로 인사를 건네는
검은 새 한 마리를 보았다, 본 듯했다




*시인의 말

모든 존재 속에 깃든 파파피네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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