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햇빛의 구멍 - 김점용

마루안 2018. 5. 14. 22:04

 

 

햇빛의 구멍 - 김점용


그가 왔다
오래전에 죽은 그가 나를 찾아왔다
내가 타던 낡은 자동차를 물려받아
여수로 설악으로 안면도로
멀리서 나를 빙빙 돌기만 할 뿐
수십 번을 불러도 오지 않던 그가
젊은 모습 그대로 나를 찾아왔다
오른손엔 붉은 펜을 왼손엔 황금빛 놋 열쇠를 쥐고 왔다
그는 생전과 달리 부끄럼을 많이 타며
말없이 웃기만 했다
미안하다는 뜻인지
고맙다는 뜻인지
웃음의 햇살만큼 나는 어두워지고
붉은 펜을 받아 그의 옷에 내 이름을 적어넣었다
놋 열쇠는 받지 않았다
그는 곧 돌아가야 할 사람
그러나 한번은 뜨겁게 안아주어야 할 사람
두 팔 벌려 힘껏 껴안으니
갑자기 늙어 바스러지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살 그의 뼈가 내 몸으로 다 흘러온 듯
백발 성성한 햇살 그림자가
조그만 열쇠 구멍이 되어 바닥에 남았다


*시집, 메롱메롱 은주, 문학과지성

 

 

 

 

 

 

배후 - 김점용


집을 나간 어머니가
옷을 뒤집어 입은 채 돌아왔다

배달된 상자를 뜯자
검은 넥타이가 나왔다

일곱개의 밥그릇에 생쌀을 담는데
마지막 그릇의 뚜껑이 닫히지 않는다



 

*시인의 말

오랜만에 새 시집을 묶는다.

삶은 나날이 비루해져가도
어딘가 마음의 별채가 있어
간다, 기어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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