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사랑, 우울한 병동 2 - 김이하

사랑, 우울한 병동 2 - 김이하 사랑한다, 그 말은 오래 전에 너에게 했던 것, 보내 버렸던 것 내 가슴의 분화구엔 눈물이 고이고 싸늘히 식어 갔다, 그러나 그 사랑과 함께 나는 살아왔다 사랑한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살아 있는 아침에 눈뜬 건 아니었지만 결국 그 사랑으로 입을 헹구고 가슴 뿌듯하게 그 기억을 챙겨 넣고야 밥 버는 길을 나서곤 했다 길을 가면서도 어딘가에 접어 둔 그 기억을 찾으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아, 사랑한다.... 그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나는 주머니 안쪽에 웅크리고 앉은 성냥갑에서 온전한 하나의 불꽃을 찾고 사랑한다, 그 말은 오래 전에 네 가슴을 찾아갔던 것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사랑을 찾아 쏟아지는 잠을 퍼내고 눈 발갛게 새벽을 맞는다, 아프다 다시 세상 속으로 미끄..

한줄 詩 2018.05.08

바람은 우주를 몰고 간다 - 김익진

바람은 우주를 몰고 간다 - 김익진 어디에서 오는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어둠의 방랑자, 바람이 분다 이 사악의 길 위에서, 에돔에서 불던 바람이 달 위에 발자국을 지운다 안과 밖이 없이 시나이 광야를 쓸던 바람이 화성에 모래를 날린다 좌우대칭 상하가 없이 소나기를 밀고 달리던 그 바람이 헥토르의 땀을 식혀주었다 우주의 오만과 폭력이 시공을 뒤섞는다 바람은 시를 쓰고, 우주를 몰고 간다 *시집/ 기하학적 고독/ 문학의전당 숱한 바람이 되어 - 김익진 시공의 끝자락, 존재와 무(無)가 하나 되는 곳까지 꽃비를 내리자던 말은 숱한 바람에 흩어졌다 은하수 저편, 어둠의 별까지 손잡고 가자 했던 맹세도 천국의 비 가야 했던 길 가봐야 했던 길 위의 약속들이 숱한 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실낙원 위에서 태양은 숨..

한줄 詩 2018.05.07

봄비, 통속적으로 - 심종록

봄비, 통속적으로 - 심종록 봄비 맞으며 떠난 기차 밤비 되어 도착하는 순천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충분히 젖어버리는 육식공룡 같은 대학병원 사각의 제모를 쓴 수위 주차료 정산하는 주차장 지나 공룡의 항문쯤으로 짐작되는 곳을 향해 걸어간다 영안실은 필시 후미진 곳에 있게 마련이다 먹은 것을 소화시키고 배설해내는 장기의 끝부분처럼 응급차에 실려 공룡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가 열흘을 버티지 못하고 싸늘한 시신이 된 너는 지금 생의 마지막 빚을 청산하기 위하여 잠시 구치중이다 너는 없고 환하게 웃는 사진 한 장이 나를 맞이한다 언젠가 너는 분명 저렇게 웃었을 텐데 도무지 기약이 없다 그래서 네 웃음이 더 쓸쓸할지도 모른다 웃는 사진 앞에 앉아 빚 갚으로 왔다가 빚만 남기고 떠나는 세상에 대하여 심사숙고..

한줄 詩 2018.05.07

기초의 순장 - 박순호

기초의 순장 - 박순호 평생 떠받들고 있어야 할 엎드린 생이 있다 등에 지고 스스로 내려놓지 못하는 무거운 생이 있다 가가호호 자동차, 가전제품, 가구, 책이 쌓여가고 식구가 늘어난다 구둣발이 등뼈 위를 눌러 찍을 때마다 지하수위가 바뀌어 누수되는 몸 참다못해 벽체에 금을 그어놓곤 하는데 저리 고약한 업(業)이 또 있을까 재건축 현장 흙을 파헤치는 곳마다 도난당했던 내 기억의 늑골이 발굴된다 매립되었던 꿈의 모서리가 노출되고 뾰족한 기억으로부터 물길이 치솟는다 공사에 동원된 인부의 이름이 기록된 수첩과 낱장의 설계도, 바람 섞인 햇살 부러진 손톱과 핏방울이 말라 있는 기초의 순장 거대한 뿌리가 햇빛에 조명되는 시간은 짧다 *시집, 헛된 슬픔, 삶창 땜빵 - 박순호 1 소나기가 덜 마른 미장 바닥을 훑고 ..

한줄 詩 2018.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