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노인과 그 가문 - 심은섭

마루안 2018. 5. 14. 21:50

 

 

노인과 그 가문 - 심은섭

 

 

태백시 장성광업소 맞은편 태백중앙병원 611호

진폐증 환자실

한 노인이 사타구니 쪽으로 고개를 구겨놓고

누워 있다 그 병상 옆에 노인을 빼 닮은 쉰 살 넘긴

노총각도 새우등을 한 채 누워 있다

두 사람의 눈길이 병상과 병상 사이에 모여 앉아

지상에서 마지막 눈물로 죽음의 층계를 닦고 있다

 

낡은 엔진소리가 세습된 노총각은

노인이 걸어온 날들을 떠올렸다

빈 도시락에 캄캄한 어둠을 채워 퇴근하던 날

이빨 빠진 사기술잔 입에 물고

낡은 유행가를 부르며 허공에 꿈을 묻어버리던 일

기침소리 골방 가득해도 빈 지갑의 주름을 펴려는

손바닥의 굳은살은 박달나무보다 단단했다

 

갱도 275km 속에서 수천 년을 침묵하던

검은 돌의 어깨를 곡괭이로 내리찍던

노인의 숨소리는 초침이 돌아갈수록

공터에 버려진 경운기 엔진소리를 냈다

 

산소마스크가 그에게 물을 뿌려주지만

서늘한 보자기는 그의 얼굴을 덮었다

칸데라*의 심지가 더 이상 불을 밝히지 못하고

그가 밀던 탄차에는 달빛만 가득 실려 있다

 

밟고 오르던 죽음의 층계를 한 계단 남겨놓은

쉰을 넘긴 노총각

그의 누대를 떠올릴 사내아이가 없어

병상 베갯머리에 앉은 누이가

시멘트처럼 굳어지고 있다

 

 

*candela: a lantern(초롱)

*시집, K 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 문학의전당

 

 

 

 

 

 

본적 - 심은섭

 


나의 창세기가 기록된 벽화 한 장 걸려 있는 그곳, 적막에 강한 항체를 가진 고요가 무성하게 자라거나 돌도끼 사용법을 익히던 그곳, 그리고 열차가 떠날 때마다 흔들리는 램프가 될 뿐,

이토록 무엇이 나를 벽화로부터 벗어남을 허용하지 않는가- 우체통 속으로 군사우편 소인이 찍힌 편지가 분주히 들락거리던 곳, 왼손잡이 바리깡이 벽돌모양의 나의 상고머리를 찍어내던 그곳,

가슴의 꽃비녀를 ‘갑’에서 ‘을’로 소유권을 넘긴 높새바람이 여전히 홧병을 앓고 있는 곳, 혁명의 군홧발소리가 수은주를 빙하의 골짜기로 내몰아도 살구나무는 기어이 꽃을 피워내던 곳, 하지만

흰개미들이 하혈하는 개기월식으로 홍해가 갈라지던 저녁, 극빈이 몰려다니던 파밭에서 부도난 신용카드가 난무하는 빌딩숲 속으로 나는 이동했다 이런 날들을 나의 출애굽기라고 항변하던 나는,

홍등가 2시의 사막을 걷거나 복면을 쓴 도시로 망명한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했다 이런 고통일수록 벽화에 대한 그리움의 상한선이 무너진 까닭을 나는 생각했다- 그곳엔 생의 대첩에서 퇴역한 늙은 저격수가 살고 있었다

 

 

 

 

# 심은섭 시인은 강원도 강릉 출생으로 관동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4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08년 <시와세계> 문학평론에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K과장이 노량진으로 간 까닭>이 있다. 5.18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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