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무 오래 - 이서린

마루안 2018. 5. 14. 21:54

 

 

너무 오래 - 이서린  이서린


매일 아침 108배 엎드렸다 일어나며 유심히 바라본 늦가을 마당
그 마당 한쪽에 벚나무 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고 있는데
 
때로는 가볍게 혹은 무겁게 몸서리치는 저 숱한 입술과 입술
 
하루 한순간 108번 흔들리다 한 며칠 지독한 떨림에도 견디더니
어느 날 몇 번 엎드리다 일어나니 비어가는 가지가 눈에 들어오는데
바람 없는 날에도 미련 없이 지는데
 
어찌 다 알겠는가
나뭇잎 하나 떨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몸부림이 있는지
작은 숨 하나 멈추기까지 얼마나 많은 신음 삼켜야 하는지

영영 가는 길이 쉬운 일이겠는가
가는 이나 보내는 이나 이토록 오래 서성이는 것을


*시집, 저녁의 내부, 서정시학

 

 

 

 

 

 

사라진 봄에 대하여 - 이서린


기차가 떠났다. 결핵 3기 분홍빛 얼굴 봄날을 가르며 제비산 모퉁이 따라 철커덕철커덕 언니는 갔다. 방학 때 서울 오면 창경원이며 남산도 구경시켜준다던 개찰구에서의 약속

철길 옆 벚꽃은 지기 시작하였고 뜯다 만 토끼풀은 소쿠리 옆에 흩어졌다. 모퉁이만 돌면 저 길을 따라가면 아름다운 세상이 있을 것 같았다.

한 끼 고구마나 옥수수죽 때문에 싸우는 형제도, 악다구니 삿대질의 옆집 아주머니도, 성냥공장의 매캐한 화약 냄새도, 지린내 진동하는 연탄집 담벼락도, 해 지는 줄 모르고 벌이던 술판과 장구 소리도 없을거라 믿었다.

빨간 고추를 손질하던 그해 가을, 엄마의 손 안에는 낙엽처럼 노란 전보 한 장이 전해졌다. 무너지던 엄마의 등에는 가을볕이 쏟아졌고 언니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마당의 토끼장이며 닭장이 없어질 즈음 식구들은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갔다. 건달의 세계를 기웃대던 오빠도, 엄마처럼 따랐던 두 명의 이모도, 끝내는 아버지마저도. 나는 아직 단발머리 철부지였는데, 봉숭아 꽃물이 손톱 끝에 남아 있었는데

그렇게 가고 싶어 꿈꾸던 서울, 나의 서울은 볼 수 없었다. 산모퉁이를 돌고 또 돌아도 고속버스를 타고 아무리 달려도 거기는 또 다른 여기일 뿐. 멀어지던 그날의 기차 꼬리처럼 그 봄이 사라졌듯이, 식구들을 영영 만날 수 없듯이

 

 

 


# 이서린 시인은 경남 마산 출생으로 199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저녁의 내부>가 있다. 2007년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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