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떤 개인 날 - 서규정

마루안 2018. 5. 14. 21:56

 

 

어떤 개인 날 - 서규정


이슬비는 낯선 땅 아무 데나 발붙이고 산다
저녁을 찾아 나선 아침이 돌아오지 못하는 한낮에
꽃밭 위에 뛰어내리는 소낙비와 만나서
강을 이루고 그렇게 시끌버끌 흘러가서는
무엇에 부딪쳐 넘어졌는지 검정 고무신을 신은 발목들이
뱃고동을 울리며 둥둥 떠 있고 침을 삼키면
목에 가시로 걸린 낮달이 쉽게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
비늘이 제일로 비싼 세상을
노동자로 살다가 혀끝을 차는 소리 때문에 무너진
한평생의 계급을 위하여 산꼭대기에도 천막집에도
비들이 새 들어오는 이유를 알려고 애쓰지 않았다
물고기가 찾아나선 강물이 투망에 걸려 돌아오지 않는
세월을 직업을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 옷은 작업복이라
강은 빨래터를 만나면 제법 깨끗해지겠지만
사람의 숲으로 끼어 들어간 나 하나의 하염없음이여
맨살의 강물에 비치는 뭉게구름에 비눗물을 풀고
부시시한 머리를 데려가 우리들의 고향 고향 시냇가에서
능수버들처럼 파릇한 빗질을 해주고 싶다마는
닭도 키우고 쥐도 키우고 사글세방 연탄아궁이에
햇덩이를 갈아넣고 땀에 젖은 작업복이 알맞게 빠져 나간
알몸을 눕히고 사는 날까지 부지런히 죽어야겠다.


*시집, 황야의 정거장, 문학세계사

 

 

 

 

 


母 母의 계절 - 서규정


바람아 어디에 살고 있어
낯선거리 찾아 찾아 헤매이면 땡볕
제 아무리 부셔도 눈물나고 어머니가 많은 나라
살다가 불새처럼 알을 까고 달아나던 신호등
부드러운 차단 앞에서는 크레파스로
철조망을 지우고 우두커니 졸립다 이 땅의 정치에겐
계모를, 종교에겐 대모를, 노동자에겐 생모를
배급하셨으니 장화를 신고 팥죽을 끓이다 보면
길 건너 갔다고 어머니 너를 잊을 줄 알고

노동의 바람아 어디에 모여 있어
이빨이 빠져 겨우 만든 휘파람으로 우체통에
군침처럼 가라앉은 공단 공주님에게
보낼 편지를 불러 높이 띄우는 것
저희들의 어머니는 80년대였어요 추추춤을
추추는게아아니라사사살아가고이있다고
나비야 물건너 갔다고 너 아닌 줄 알고
불어 버릴거야 휘파람으로 다시 불러 버릴 것이다


 


# 서규정 시인은 1949년 전북 완주 출생으로 199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황야의 정거장>, <하체의 고향>, <직녀에게>, <겨울 수선화>, <참 잘 익은 무릎>, <그러니까 비는, 객지에서 먼저 젖는다>, <다다> 등이 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죽음을 기울이다 - 김창균  (0) 2018.05.14
햇빛의 구멍 - 김점용  (0) 2018.05.14
너무 오래 - 이서린  (0) 2018.05.14
노인과 그 가문 - 심은섭  (0) 2018.05.14
추억 속의 들꽃 한 송이 - 정윤천  (0) 2018.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