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추억 속의 들꽃 한 송이 - 정윤천

마루안 2018. 5. 14. 21:45

 

 

추억 속의 들꽃 한 송이 - 정윤천

 

 

쑥물만치나 쓰던 날들 속에

일 늦은 아부지 야윈 몫시밥

끝내 훔쳐묵고 말았던 한저녁에

저런 오살 새끼

사람 노릇 당초에 애시부텀 그른 자식.....

마른 목청으로 엄니는 꺽꺽 목이 메이고 말고

등짝 가득 새끼줄처럼 감겨오던

싸대기 몇 찌검을 그래도 견뎌보다가

종내 쫓겨나왔던 사립문 화들짝 밀치면

거기 허기보다 더 높게 뜨고

그보담 더욱 쓰라렸던

눈매 칼칼한 달빛 한 자락

휘영청 동네 끝으로 내쳤던 밤길.....

순간에 살오름 돋던 한기로 으시시 떨려오던

부황든 밤부엉이 소리 어두컴컴한 두어 소절

그런 밤이면 우리 아부지

맹물로 멀건하게 불린 허허벌판의 잠결에

뒤채어 잠 못 이루시던 시린 잠결 너머로

지지리도 더디 왔었던 어느 봄날 어귀

내 무참한 기억 속에 꼭 그 자리에

노오랗게 피고 졌던 키 작은 풀꽃 한 송이.

 

 

*시집, 생각만 들어도 따숩던 마을의 이름, 실천문학사

 

 

 

 

 

 

한 평생 - 정윤천
-어머니. 하나


울 엄니는 열아홉 봄날 아침에 먼 길을 오셨답니다
그날 아버지네 마을의 햇볕들은 참으로 따뜻이 눈에 부셨고
마당가 꽃잎 틔운 살구꽃 그늘
그 아래 소년처럼 웃고 서 계셨던
아버지의 처음 모습을
울 엄니는 지금도 총총 기억하고 계신답니다
달뜬 울 엄니의 귀언저리에
홍시빛 부끄러움의 찐한 물이 들고
물든 그 가슴을 열어 난생 처음인 아버지를 맞던
첫날밤, 뒤채이며 새운 이룬 새벽참엔
암도 모를 눈물도 한줄금 떨궜더랍니다
그렇게 하여 울 엄니는
그 집의 감나무 가지 하나 이쪽에서부터
저쪽의 살구나무 가지 하나 그 거리만큼
넉넉한 빨랫줄을 한 줄 내걸었더랍니다
빈 빨랫줄 위로 울 엄니의 평생의 날들이
물기 많은 빨래가 되어 지나갔는데
저 먹을 것 없었던 날들도 가고
저 깜깜밤중이었던 낭들도 가고
아! 그랬답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구속의 마음으로
당신이 매단 사랑에의 끈, 한생애의 매듭이었더랍니다
어쩌다 우리들 귀향 때면 울 엄니는 아직도
삭은 빨랫대 위에
지금은 당신 자신이 물기 빠진 빨래가 되어
허옇게 나부끼고 계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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