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거울 앞에서 - 박승민

마루안 2018. 5. 14. 19:31

 

 

거울 앞에서 - 박승민


스무 살 때
"우리 이제 그만 헤어져"란 여자의 말은 공황이었다
신발 뒤축만 따라 돌계단 내려올 때
10월의 별들 이빨을 물고

물때를 아는 파도가 모래의 발등을 적시듯
기다리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한 번은
불시착하는 것

집 떠난 소년처럼 낯선 항구를 떠돌다가
마침내 고향집 문 앞에 서는 것

다만 그 망망대해,
혼자 남는 날
내가 지을 수 있는 몇 가지 표정에 대해서
숙고 중인 것이다

사람은 어떤 자세로
마지막 잔을 비워야 하는가
덜 추해지는가
거울 앞에서
3류 배우처럼 이리저리
표정을 잡아보는 것이다


*시집, 지붕의 등뼈, 푸른사상사


 

 



메모 - 박승민


지금 이 세상 어느 수은등 밑에서
울고 있는 사랑도 있다는 것을
너는 알아야했다

세상이 우리를 돌게 할지라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돌기 위해
우리는 술을 마시는 거다

각자 자기 앞에 놓인
삶의 수위를 눈금으로 재면서

생(生)이 비루하고
때로 지하에 떨어지는 철렁함이
매 끼니마다 찾아온다 해도
꽃은 어느새 날아와 그 자리에 피었다

마누라가 버린 자식새끼를 바라보는 눈으로
나는 이 세상을 바라보겠다

지금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밑줄 그어진 외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벼랑 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허리가 끊긴 채 온몸으로 바닥을 치는
지렁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나 없어도
나 앉았던 자리에서 꽃이 피고 눈이 내리는 쓸쓸함에 대해서
아니, 그 아무렇지도 않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 박승민 시인은 1964년 경북 영주 출생으로 숭실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지붕의 등뼈>, <슬픔을 말리다>가 있다. 박영근작품상, 가톨릭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 어미의 턱 밑 - 황학주  (0) 2018.05.14
끝이 휘어진 기억 - 김남호  (0) 2018.05.14
문밖에서 - 박용하  (0) 2018.05.13
심문관 - 김성규  (0) 2018.05.13
절반이라는 짠한 말 - 오은  (0) 2018.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