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연대기 - 육근상

연대기 - 육근상 강물이 무명의 종이처럼 버드나무 가지 매달린 헝겊처럼 칼빛으로 출렁거린다 지난겨울에는 물결 소리 견디지 못한 강물 다 얼어붙었다 며칠 전에는 매바위 넘던 노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머릿수건 고이 풀어놓고 물살 건너갔다 산작약은 또 무슨 억울한 사정 있어 싸락비 불러내어 이마 쿵쿵 찧고 있는가 봉분 옆으로 양단 마름이나 끊어다 입힌 듯 할미꽃 고개 끄덕인다 나는 아버지가 매어놓은 뱃머리 마을 살면서 달빛이며 꿩이며 풀잎의 서러운 얘기 다 들어주었다 오늘 밤에는 강물이 남은 신에 다 털어놓는 듯 너울너울 흘러간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이 몸이여 홀로 살아가는구나* - 육근상 나는 이제 빨랫줄에 해지고 구멍 난 셔츠로 걸려 있다 바람 들락거리기 좋았으니 풀 먹은 베옷처럼 얼어 앙상한 갈비뼈..

한줄 詩 2022.03.20

마스크 꽃 - 박수서

마스크 꽃 - 박수서 - 코로나 19 봄꽃도 피지 않았는데 먼저 사나운 바람이 불어왔지 바람은 세상의 꽃잎을 때리고 울렸어 멍든 개나리꽃이 누렇게 놀라 주저앉아 버렸고 병든 개망초는 부전나비에게 젖을 물리지 못했어 접시꽃은 잎겨드랑이가 쑤시고 절려 밥을 짓지 않았어 세상은 바람에 혼쭐이나 콜록콜록 계절을 보냈고 이윽고 겨울이 왔어 바람은 더욱 기운이 왕성해졌고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 무서운 애기동백은 바람이 멈출 때까지 방바닥에 엎드려 기다리고 있어야 해 세상 꽃이 아파 꽃밭은 벽처럼 바람막이가 꽂혔어 꽃도 꽃들끼리 어울려야 예쁘고 꽃다울 텐데, 걱정하지 마 흰 꽃, 검정 꽃 사람들의 입을 막고 착한 꽃폈으니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꽃피는 일은 무사할 거야 *시집/ 내 심장에 선인장꽃이 피어서/ 문학과사람 ..

한줄 詩 2022.03.20

구름의 행로 - 복효근

구름의 행로 - 복효근 어제는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왔으므로 구름은 동쪽으로 흘러갔다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도 구름은 흘러갔다 아침녘엔 어치가 와서 놀다 갔는데 오후엔 물까치가 왔다 갔다 다시 새를 기다리는데 가까운 선배 모친 부음이 왔다 잠히 후엔 거리조차 먼 선배 모친의 부음이 왔다 둘 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먼 쪽을 택해 조문을 갔다 빈소에 아는 조문객도 없고 해서 슬그머니 나와 바닷가 횟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아닌 쪽에서 부음이 오기도 하고 없는 쪽에서 구름이 오기도 한다 내가 가는 날 아주 먼 후배가 조문을 왔다가 가까운 중국집에서 짬뽕을 먹고 갈지도 모를 일 내일은 박새가 몇 마리 놀러 올지도 모른다 혹은 아무것도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집/ 예를 들어 무당거미/ 현대시학사 장례식장 엘리베..

한줄 詩 2022.03.19

홀로 남은 등 - 김남권

홀로 남은 등 - 김남권 쓸쓸함이 어둠의 등 뒤로 소리 없이 쌓이고, 울음소리 감춘 새벽을 걸어 나와 풀잎 아래 이슬로 눕는다 동이 트도록 풀잎의 뒤척이는 소리로 강물은 깨어나고 하늘의 첫 물을 길어와 홀로 남은 별을 씻었다 별도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지상의 슬픈 등 하나를 보려고 수억만 년 고향을 버리고 내게 왔다 지친 하늘의 몸을 누이려고 꽃을 한 아름 안고 왔다 햇살이 빛나는 동안에도 홀로 남은 등은 빈 그림자를 안고 말이 없었다 한 번도 안겨본 적 없는 등에는 굳은살이 배겨 있었다 그림자도 나이를 먹으면 단단해진다는 걸 처음 알았다 누군가를 안아보면 안다 가슴이 시린 사람의 등에선 북소리가 난다는 것을, 속이 텅 비어 있어서 누군가 두드려주지 않으면 저 홀로 바람에 길들여진 채 갈라..

한줄 詩 2022.03.16

당신 또한 천사들의 장난감을 가졌지 - 김륭

당신 또한 천사들의 장난감을 가졌지 - 김륭 다른 사람을 가지고 싶은 마음 몸 밖으로만 떠돌다 입이 지워진 말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그러나 언제나 늙은 고아 같아서 아프다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라 명사라고 쓴다, 가만히 물을 두 뺨에 대 보는 돌멩이처럼 얼마나 더 울어야 보일까? 몸에 없던 구멍이 생겼다 개가 드나드는 개구멍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꺼내거나 사람이 사람 속으로 숨어드는 구멍, 천사들이 날개를 말리거나 장난감을 갖다 놓아 아직 그 누구도 찾지 못한 구멍 요양병원에 누워 계신 어머니 두 뺨에도 스르르 나타나기도 하는 구멍에 눈이 멀고 귀가 먼 나는, 그런 내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당신 또한 옛날 영화 속으로 돌아가서는 오래된 미래가 됩니다 다시 기다려야 됩니다 아주 잠깐 자고 일어났더니 나이..

한줄 詩 2022.03.16

삶은 그렇게 완성되리라 - 권순학

삶은 그렇게 완성되리라 - 권순학 아직 청춘이지만 퍽 소리 한번 질러본 적 없는 화장 한번 한 적 없는 그러나 어처구니없이 가려는 이를 위해 떠나보내는 자들이 흔들리지 말라고 잊지 말자고 눈물 젖은 꽃으로 약속을 한다 술은 적이고 동지지만 제사 술은 술이 아니라며 함께 제를 지내자던 이를 위해 잔을 올린다 부고보다 더 빨리 달려온 부슬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남은 체온으로 불 당겨지고 시간은 굽어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삶은 그렇게 완성되리라 *시집/ 너의 안녕부터 묻는다/ 문학의전당 이명(耳鳴) - 권순학 자물쇠 하나 고장이 났다 종종 찾아오는 이명(耳鳴) 새가 집을 지었나 보다 새의 전생은 분명 나무였을 게다 뿌리박고 오르다 더 오르지 못하던 어느 날 날기를 결심하였을 때 솟지 않는 용기를 굴뚝에 부추겼..

한줄 詩 2022.03.16

무허가 건축 - 최백규

무허가 건축 - 최백규 우리는 그저 혈관 아래 불을 지피는 개들이었다 지하상가 라디에이터 앞에서 피 묻은 손바닥을 덥히며 재미있었다고 그래도 다시는 못하겠다 같은 말이나 흘리다가 웃을 날이 번질 테지만 아직 불발인 폭죽에 계속해서 성냥만 긋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이해하니까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고 욕설조차 없이 떠나버려도 녹슨 세면대처럼 여기에 있다 개의 이빨로 얼음을 깨무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매일 하나씩 악몽들 적어 선물하면 언젠가 눈빛이 조금 더 사나워져 있을까 관에 들어가 묶이는 건 포토 부스 안처럼 뻣뻣하고 어색할까 막연하게 그려보는 너의 노년은 언제나 혼자여서 어디서부터 놓아주어야 할지 따위의 생각만 잔뜩 했다 턱을 괸 염색이 제대로 먹지 않아 슬픈 너와 손을 잡으..

한줄 詩 2022.03.15

볼륨 - 김승종

볼륨 - 김승종 몰래 화장하고 부드럽게 떼를 써도 삶은 한정된 볼륨 누구나 위대한 말씀 따라 레버를 올리기도 내리기도 하지만 익숙해져 풀 죽었다가 이마저 낯설어져 또 꿈꾸려 하고 흰 머리칼 버리기를 우리는 꺼리는지 몰라 오늘은 볼륨을 올리지도 내리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그대로 들으며 만취한 꿈속 쓸쓸한 루주 칠한 몸 깨워 자기 앞의 삶 그 시작과 끝을 이제 한번 노닐어 보자 사라져 가네 뭉클한 것 화살인가 활인가 과녁인가 아니라면 그게 무엇인가 우리인가 볼륨을 높이고 숨겨 둔 춤을 춰 보아야 하나 소식 준 옛 친구여 그대 오늘은 유죄다 그것을 알아내기를 오토산(五土山)을 그리워하는 견자(見者)들에게 먼저 알리고 우리 젊은 날에도 회수(回首)의 편지를 쓰기를 구태여 그 끝에 '이제 안녕히'라고 쓰든 말든..

한줄 詩 2022.03.15

공중에 새들이 가득한 날 - 박지영

공중에 새들이 가득한 날 - 박지영 지친 노동에 하루 치가 뭉그러진 곳에는 당신이 있습니다. 맨드라미, 민들레, 나비, 종달새에 이르기까지 햇빛 쨍한 날 찾아가는 친정집 향한 풀섶 위에 발등을 가르는 바람 소리로 솔깃하던 당신, 태풍 소식에 대목장도 서럽고 동동거리는 마음에 빈궁한 장바구니를 뒤로 감추며 남은 아이 둘 데리고 도끼비시장을 배회하다 보면 도래지를 잃은 도래지를 잃은 날갯짓이 공중에 가득합니다 *시집/ 돼지고물상 집 큰딸/ 실천문학사 아버지의 하루 - 박지영 마지막 넝마주이가 집을 나서면 그 시끄럽던 마당도 30촉 전구 하나만 흐릿하게 남는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낮에 들어온 이웃집 송사의 무임 대소서 일을 시작했다 불 끄라는 엄마의 통박에 아버지가 하시던 말은 '이거라도 해야 우리 먹고사는 일..

한줄 詩 2022.03.14

셋 중 하나 - 이현승

셋 중 하나 - 이현승 세상에 부모는 세 종류뿐이다. 서툰 부모, 어리석은 부모, 나쁜 부모. 팔이 부러진 신(神)은 놀라서 울고, 아프고, 잠들고, 소스라친다. 아픔을 보는 것만으로 몇 배는 더 아플 수 있지만 결국 대신 아플 수는 없으며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밖에 없는 사람들이란 자기를 책망하고 힐난하는 것밖에 없다. 불행을 믿고, 불안에 의지하며, 행운을 간구할 수밖에 없는 쓸쓸한 신앙인일 수밖에 없다. 팔에 붕대를 감은 신은 깨어나 롤리팝을 핥으며 세상을 다 가진 미소로 화답하기까지는.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죄인 - 이현승 회귀란 너무 멀리 떠나왔다고 자각한 자의 것일까 회심은 늘 그 자리에서 멈춘다. 돌아갈 수 없는 자에게 떠나온 자리는 책망의 자리다.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킨 ..

한줄 詩 2022.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