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나비 박쥐 - 김남권

나비 박쥐 - 김남권 나는 나쁜 피를 빨아 먹는 박쥐다 어둠을 밥보다 좋아하고 어둠 속 불빛의 길에서 하이에나처럼 바람의 통로를 따라 움직인다 머물 곳이 없어 평생을 거꾸로 매달려 잠자리에 들고 거꾸로 매달려 눈을 씻었다 동굴보다 깊은 어둠 속에서 오직 허공을 날아오는 하나의 주파수만 찾았다 시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가슴속의 파동을 기억하는 그 사람의 등 뒤에 숨어서 숨소리만 들었다 솜털이 일어서는 오감을 열어놓고도 한 번도 그립다는 말을 못했다 반백 년을 넘게 비워논 하늘 아래서 한겨울에도 지지 않는 하얀 민들레꽃 한 송이로 피어나 서러운 눈물조차 삼켜야 했다 눈보라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동면에 들기 전, 심장이 잠시 멈추는 법을 배우고 옛사랑의 그림자를 베어 하얗게 솟구치는 그 피를 마시고 어둠 속을..

한줄 詩 2022.04.05

내가 민들레를 울렸을까 - 이은심

내가 민들레를 울렸을까 - 이은심 올봄엔 노랑에 든 도둑이나 되어야겠다 손을 들어도 새 울음 따위가 그냥 지나가는 춘분의 변두리 존댓말로 입술을 핥는 아득함 속에서 내가 당신을 울렸을까 모아놓은 느낌표를 잠시의 사소함에 줘버리고 작년만큼 웃었는지 당신 없는 웃음을 접어 날렸는지 봄은 아무에게나 오지만 아무나 아픈 봄은 아닌 걸 세상이 쪼그려 앉아야 잘 보일 때 봄은 옳았고 앉은키로 다가가는 당신에겐 다 커버린 상처를 지지하는 혼자만의 처세술이 옳았다 장수하는 국화과의 아픔이 낳았으나 기르지 못한 미만(未滿)의 슬픔을 가만히 끊고자 무딘 노랑을 민들레로 보았던 것이다 냉이나 달래 앞에 허리를 굽힐 때 담벼락 아래 옆으로 옆으로 번성하며 꼭 하루 부족했구나 우리 사이 들판처럼 멀리 나가는 난색(難色)은 어린..

한줄 詩 2022.04.02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김애리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 김애리샤 이장인 아빠가 마이크를 잡으면 난정리엔 주황색 난초꽃 향기가 공지사항처럼 번졌다 선거철엔 아빠가 전송하는 하얀 봉투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조금씩 부자가 되었고 죽산포 술집에서 아빠의 딴따라는 깊은 밤 잠든 파도까지도 깨워 춤추게 했다 아빠가 지금 누워서 볼 수 있는 세상은 천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천장 가득 태어나는 꽃송이와 춤추는 파도를 바라보는 일 아빠 기저귀를 갈아주는데 항문에서 찌그러진 달덩이가 굴러 나왔다 파내도 파내도 계속 나오는 달덩이 아빠는 점점 가늘어졌다 아빠 속을 다 파먹은 벌레들이 살이 올라 달덩이 흉내를 내며 아무렇게나 빛났다 가난도 아빠를 파먹고 무성하게 자랐었는데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일수록 부지런히 자란다 아빠가 헝겊 인형이라면 배를..

한줄 詩 2022.04.02

이제 가노니 - 허형만

이제 가노니 - 허형만 이제 가노니 본시 온 적도 없었듯 티끌 한 점마저 말끔히 지우며 그냥 가노니 그동안의 햇살과 그동안의 산빛과 그동안의 온갖 소리들이 얼마나 큰 신비로움었는지 이제 가노니 신비로움도 본시 한바탕 바람인 듯 그냥 가노니 나로 인해 눈물 흘렸느냐 나로 인해 가슴이 아팠느냐 나로 인해 먼 길 떠돌았느냐 참으로 무거운 인연줄이었던 것을 이제 가노니 허허청청 수월(水月)의 뒷모습처럼 그냥 가노니 *시집/ 있으라 하신 자리에/ 문예바다 뒷굽 - 허형만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 봐 겁났고 우빨..

한줄 詩 2022.04.01

문득 뿔은 초식동물의 것이라는 생각 - 이현승

문득 뿔은 초식동물의 것이라는 생각 - 이현승 집도의가, 환자분 얼마나 아프세요? 일부터 십 중에 몇인지 말해보세요, 물을 때 이 악물고 뒹구는 사람의 고통이 십, 십, 아니 백이라도 결국 십을 찍으면 구나 팔로 향하게 마련이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을 생각할 때에는 뽑혀나간 뿔을 더듬는 심정으로 도대체 산 채로 제 뿔을 빼앗긴 심정은 어떨 것인가. 종종 우리가 마취제를 맞고서 훌쩍 다녀온 저 십의 세계란 한도를 초과하여 계측 불가능한 슬픔 같은 것은 아닌가. 그때는 딱 죽을 것만 같았지만 제법 살 만해졌다고 생각될 때, 그때 문득 다시 아프다. 아픈 건 늘상 처음 같은데 견딜 만하다는 건 처음만큼은 아니라는 거. 남보다 더 아파본 사람이 충고라도 한다. 꼭 십까지 가봐야 구나 팔에게 충고하는 건 아니다...

한줄 詩 2022.04.01

발라드풍으로 - 한명희

발라드풍으로 - 한명희 -지천명을 등에 업고 몸 여기저기 불다 만 풍선처럼 물집이 나 있다 눈 부릅뜨고 봐도 알 수 없는 세상을 위하여 시를 쓰던 당신은 모래밭에 집을 짓고 나는 발라드풍으로 노래를 한다 커피숍 한쪽 구석에서 너무도 자주 네 꿈을 꾸었기에 그때는 밤이었지요 말라비틀어진 나무에도 연분홍 꽃이 피는 아침 집채만 한 파도쳐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방파제 또는 열기구, 가슴속에 불을 지피던 여자를 찾아가다 추락한 어느 섬 헤엄쳐 나올 불면의 바다였지요 누군가 미소 띤 얼굴이 보내는 한 잔의 따뜻한 질책과 초승달 같은 눈빛의 차가운 격려 속에 모래밭에 집을 짓고 알 수 없는 시나 쓰던 당신처럼 지천명을 등에 업고 견디는 하루는 파도쳐 쉽게 지치고 사막을 걷다 물집에 잡힌 몸은 기댈 곳이 필요..

한줄 詩 2022.04.01

미스김 라일락 - 김미옥

미스김 라일락 - 김미옥 삼월에서 사월 사이 집중적으로 아파요 지하상가 입구에서 전단 돌릴 때 이마에 꽂히는 햇빛들 겨드랑이에 두 손 넣은 채 마시는 녹작지근한 공기 무관심한 선배들 심부름에도 창밖은 환하게 빛나요 휴일이면 해동된 채 잠만 자요 일억 년 후 깨어났는데 구석기 여인이 되어 있다면 산뜻한데 우울한 기분이 이런 걸까 월급이 제일 적은 내게 경리계장은 십 원짜리까지 철두철미했고요 그 아저씨 도박으로 횡령사고 냈을 땐 내 심장이 더 쫄깃했어요 바람이 확 구부러졌다가 매섭게 감기는 날 개나리 한 아름 화병에 꽂아두고 쓸모없어진 단백질처럼 웃었어요 어릴 때 기억은 중국집 간판처럼 희미하지만 교문 앞 할머니가 팔던 병아리 죽기 살기로 울어대던 주둥이들은 잊히지 않아요 삼사일 못 견디고 기어이 죽어 버린..

한줄 詩 2022.03.31

흉한 꿈을 꾸다 깬 저녁 - 심재휘

흉한 꿈을 꾸다 깬 저녁 - 심재휘 마루에 오후의 봄볕을 깔고 그 위에 담요 한장을 더 깔고 엎드려 턱 괴고 바깥을 보면서 잠이 든 모양이다 흉한 꿈을 꾸다가 깨어보니 어느덧 몸이 식은 저녁 돌아가시기 전에 속이 안 좋던 아버지는 식은 밥을 뜨거운 물에 말아 드셨다 무엇을 할 수도 없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해 질 녘에는 내 등을 두툼하게 덮어주다가 기울다가 인사도 없이 떠난 햇살이 너무 멀고 흉한 꿈속의 사람은 노을 전 서편처럼 붉게 피었다 진다 삼월의 빈집은 겨울보다 더 추운 계절 동네 아이들 노는 소리가 왁자한 저녁에 차가워진 배를 문지르면 배는 이내 뜨신 물속의 식은 밥처럼 온기가 돌고 배 속 먼 곳은 손이 닿지 않아서 여전히 차고 자다 깬 저녁은 금세 어두워진다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

한줄 詩 2022.03.31

썰물 연구 계획 - 전대호

썰물 연구 계획 - 전대호 이쪽 바닷자락이 슬슬 쓸려나가는 걸 보면서, 수평선 너머 저쪽 자락을 어떤 거대한 손이 쓱 잡아당기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여섯 시간 후 이쪽 자락 도로 슬슬 밀려드는데, 거대한 손은커녕 바닷자락을 문 갈매기조차 안 보여 냉철하게 가설을 바꿨네. 수평선 근처 물밑에서 어떤 거대한 손이 거기 한가운데 자락을 엄지, 검지, 중지로 살짝 쥐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위로 올렸다 하는 것이 틀림없어! 수평선 근처 바다는 늘 잔잔하여, 살짝 건드린 자리도 대번에 눈에 뛸 테니, 검증은 일도 아니리. 수평선 바로 위에서 저공비행으로 수평선을 넘나드는 사인곡선을 그리면서 거기 잔잔한 바다, 더없이 고요한 그 기하학적 평면을 샅샅이 살피자. 꼬집힌 자국이 틀림없이 보일 것이다. 잘 다린..

한줄 詩 2022.03.30

아프지 마, 라고 네가 말할 때 - 강문숙

아프지 마, 라고 네가 말할 때 - 강문숙 한 사흘 대답 없던 톡에 깨알 숫자 사라지고 댓글 뜬다 주말엔 폰을 아예 책상 서랍에 넣고 지내 일찍 난로를 꺼 버린 탓에 감기가 왔나 봐 이제 난 좀 괜찮아졌지만 걱정했을 네가 더 걱정이야 너는 아프지 마 아프지 마, 라는 말 참 아프게 다정한 말 봄꽃 피려다가 꽃샘바람에 움츠러들 때 가는 입술 벌려 봄볕 받아먹고 있던 저 나뭇가지를 꺾어서 쓰는 말 어떤 색으로 피어날지 알면서도 난생 처음 본 색깔인 양 신기한 꽃잎 속 하얀 입김 같은 말 말에도 온도가 있어 느린 게이지 곡선으로 끌어올리다 노을 같은 발음으로 아프지 마, 네가 말할 때 아프다가도 나는 안 아프고 그래서 더 아프고 *시집/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천년의시작 모로 눕다 - 강문숙 따스하게 ..

한줄 詩 2022.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