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무허가 건축 - 최백규

마루안 2022. 3. 15. 21:58

 

 

무허가 건축 - 최백규

 

 

우리는 그저 혈관 아래 불을 지피는 개들이었다

 

지하상가 라디에이터 앞에서 피 묻은 손바닥을 덥히며

재미있었다고

그래도 다시는 못하겠다 같은 말이나 흘리다가

웃을 날이 번질 테지만

 

아직

불발인 폭죽에 계속해서 성냥만 긋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이해하니까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고 욕설조차 없이 떠나버려도

녹슨 세면대처럼 여기에 있다

 

개의 이빨로 얼음을 깨무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매일 하나씩 악몽들 적어 선물하면 언젠가 눈빛이 조금 더 사나워져 있을까

관에 들어가 묶이는 건 포토 부스 안처럼 뻣뻣하고 어색할까

막연하게 그려보는 너의 노년은 언제나 혼자여서 어디서부터 놓아주어야 할지 따위의 생각만 잔뜩 했다

턱을 괸

염색이 제대로 먹지 않아 슬픈 너와

 

손을 잡으면

아무 우편함에서 포장지를 뜯어 구기고 있다는 감정이 들었다

 

거기서부터 무언가 지어지기를 기다렸다

 

 

*시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창비

 

 

 

 

 

 

유사인간 - 최백규

 

 

난간의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던 비행운을 되감으려 내가 처음부터 다시 살았구나

어둡고 습한 미래가 노려보거나 함부로 밀치고 비웃지 않으면 좋겠다

절대로 이곳에 혼자 두지 않을게

설마른 잠과 구겨진 이불 사이 접어놓은 슬픔을
흉하게 앓는다
이렇게 작고 뭉개진 발음으로는
사랑한다는 중얼거림이나 살려달라는 혼잣말도 엇비슷하게 들린다

빈손을 보면 설핏 비석 같아서 흙을 쏟아 내리지 않아도 숨에 향냄새가 배어든다
바람이 창을 흔들 적마다 귀신이 몸을 펴고

먼 시간에서 거슬러오며 이곳을 스치는 동안 풋사과는 익어가다가 툭 망가진다
목줄로 묶어둔 영혼이 희미해지듯이

눈동자에 돋은 잎들이 무성하게 차오르고 온통 무더워질 때
머리맡에 자란 나뭇가지를 죄다 꺾어
꽃다발로 엮는다

오래 죽어 있어서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뻔했다

 

 

 

 

# 최백규 시인은 1992년 대구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4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