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남은 등 - 김남권
쓸쓸함이 어둠의 등 뒤로 소리 없이 쌓이고,
울음소리 감춘 새벽을 걸어 나와
풀잎 아래 이슬로 눕는다
동이 트도록 풀잎의 뒤척이는 소리로
강물은 깨어나고 하늘의 첫 물을 길어와
홀로 남은 별을 씻었다
별도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지상의 슬픈 등 하나를 보려고 수억만 년
고향을 버리고 내게 왔다
지친 하늘의 몸을 누이려고 꽃을 한 아름
안고 왔다
햇살이 빛나는 동안에도 홀로 남은 등은
빈 그림자를 안고 말이 없었다
한 번도 안겨본 적 없는 등에는 굳은살이 배겨 있었다
그림자도 나이를 먹으면 단단해진다는 걸 처음 알았다
누군가를 안아보면 안다
가슴이 시린 사람의 등에선 북소리가 난다는 것을,
속이 텅 비어 있어서 누군가 두드려주지 않으면
저 홀로 바람에 길들여진 채 갈라터지고 만다는 것을,
*시집/ 나비가 남긴 밥을 먹다/ 시와에세이
고려장 - 김남권
고목에는 새도 날아와 앉지 않는다는데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얼마나 부끄럽고 염치없는 일이냐
베어지지 않고 뿌리 뽑히지 않고
부러지지 않고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껍질 속에 단단히 감추고 이순을 넘는다니
얼마나 잔인한 일이냐
요절한 시인들은 오늘도 살아남아서
소녀들의 심장에서 펄떡이고 있는데
나는 어쩌자고 아직 살아남아서
꽃 한 송이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새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
가지를 뻗치고 있느냐
흘러가는 바람이라도 한 줄기 잡아야겠다
지나가는 벌레라도 한 마리 불러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발가락부터 썩어 들어가는
육신의 냄새를 어찌 감당하겠느냐
저 이름 모를 풀씨 하나 발아하기 위해
세상을 꽃 피울 동안
새들이 날아와 앉을 몸속의 틈 하나
열어, 간 쓸개부터 모조리 내어주어야겠다
# 김남권 시인은 경기도 가평 출생으로 2015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왔습니다>, <발신인이 없는 눈물을 받았다>, <등대지기>, <하늘 가는 길, <불타는 학의 날개>, <빨간 우체통이 너인 까닭은>, <저 홀로 뜨거워지는 모든 것들에게>, <바람 속에 점을 찍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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