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스크 꽃 - 박수서

마루안 2022. 3. 20. 19:41

 

 

마스크 꽃 - 박수서
- 코로나 19 


봄꽃도 피지 않았는데
먼저 사나운 바람이 불어왔지
바람은 세상의 꽃잎을 때리고 울렸어
멍든 개나리꽃이 누렇게 놀라 주저앉아 버렸고
병든 개망초는 부전나비에게 젖을 물리지 못했어
접시꽃은 잎겨드랑이가 쑤시고 절려 밥을 짓지 않았어
세상은 바람에 혼쭐이나 콜록콜록 계절을 보냈고
이윽고 겨울이 왔어
바람은 더욱 기운이 왕성해졌고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 무서운 애기동백은
바람이 멈출 때까지 방바닥에 엎드려 기다리고 있어야 해
세상 꽃이 아파 꽃밭은 벽처럼 바람막이가 꽂혔어
꽃도 꽃들끼리 어울려야 예쁘고 꽃다울 텐데,
걱정하지 마
흰 꽃, 검정 꽃 사람들의 입을 막고 착한 꽃폈으니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꽃피는 일은 무사할 거야

 

 

*시집/ 내 심장에 선인장꽃이 피어서/ 문학과사람

 

 

 

 

 

 

춘분 - 박수서


봄비가 내리지 뭐야
말짱한 마음이 젖는 건 또 뭐야
봄은 아직 밀어 올리지 못한 싹이 남은게지
떨궈낼 수 없는 미련을 탈탈 털어내지 못한 게지
지긋지긋하게 내 몸에서 맹아(萌芽)처럼 자라고 있는 당신,
빠져나갈 징후가 없어 견디기 어려운 봄날이지
먼 기억의 저곳으로 싹둑 잘라 버리려 하면 이곳이 아파 와
아파도 아파도 너무 아파 와 구멍 난 내 가슴이*
빗물에 한가득 고인 웅덩이처럼, 자칫 누구에게 흙탕물이 튈 수 있는
가슴을 파고 파서 더는 그립지 않다거나 겨우 잊을 수 있다는 헛것을
그곳으로 보내야겠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당신과 내가 평행선을 긋고 살아간다면
끝내 만날 수 없어 참 마음 편해지겠지
다음날부터 낮이 점점 길어지겠지
어둑한 방에 혼자 웅크리고 반짝반짝 당신을 켜는 밤이 짧아지겠지
어느 날은 기억의 스위치를 끌 수 있겠지


*조승구의 노래 <구멍난 가슴>에서 인용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이를 먹는다는 것 - 유기홍  (0) 2022.03.21
연대기 - 육근상  (0) 2022.03.20
구름의 행로 - 복효근  (0) 2022.03.19
홀로 남은 등 - 김남권  (0) 2022.03.16
당신 또한 천사들의 장난감을 가졌지 - 김륭  (0) 2022.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