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뇌물과 유서 - 허혜정

뇌물과 유서 - 허혜정 뇌물, 그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예약된 운명이 아니었던가 울컥 쓴물이 넘어와도 멀쩡하게 뭐든 갖다 바쳐온 이 비굴한 손가락을 짖이겨버리고 싶다 투덜투덜 내주던 유리컵도 내던져버리고 싶다 언제나 소파에 주저앉아 나의 피로를 잔인한 오락처럼 즐기던 얼굴 잘 하면 편의를 봐주겠노라는 느끼한 혓바닥 독거미처럼 거미줄을 치는 피곤한 호출 자존심을 통째로 요구당한 순간을 내 손은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짙은 코팅창이 달린 세단을 몰고 가는 평판 높은 그들을 커튼 뒤에서 지켜봤었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귓속말을 주고받는 정치꾼들처럼 조용히 의자를 바꿔앉고 힘을 틀어쥐는 걸 왜 세상은 코앞의 일만 빼고 거창한 뉴스만을 떠들어대는가 제 코앞에 흐르는 뇌물에 대해서는 입을 닦는가 그러나 세상은 내..

한줄 詩 2018.06.08

그리운 시절 - 서영택

그리운 시절 - 서영택 아무도 그 집에 산다고 말하지 않았다 블록 담 열두 가구가 사는 집 늙은 쥐와 새끼 쥐가 그늘과 햇빛을 몰래 드나들고 담장 널린 햇빛에 홑청이불을 널었다 대문 밖에는 연탄재가 쌓인다 어디선가 된장 끓는 냄새, 좁은 한 뼘 그늘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골목길에 종을 흔들고 회전목마가 왔다 아이를 업은 새댁들 수다가 벌어지는 동네 뉴스 스튜디오 간밤 생긴 일에 손뼉을 치고 듣는 여자들의 어머, 어머 눈동자가 커진다 이웃들이 주소 대신 붙여 부르던 정든 별칭, 열두 가구 집 큰소리 한번 없이 정붙여 살았다고 청춘 시절이었다고 그 사람들 다 어디 갔을까 *시집, 현동 381번지, 한국문연 잡초 - 서영택 1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던 해, 우리는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무교동에서 낚지복음..

한줄 詩 2018.06.08

우리들의 자세 - 허은실

우리들의 자세 - 허은실 내가 일곱 살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앞에 다리를 벌린 여자 또 딸이었다 들일 때나 낼 때 지울 때에도 같은 자세인 이유 산부인과에 누워 생각한다 여와도 하와도 다리를 벌리고 싶었을까 가이아도 가시나들처럼 치마를 걷고 오줌을 누었을까 따뜻하고 둥근 방 꽃길 속으로 나비 한 마리 팔랑 날아간다 고요한 세계가 진저리친다 태초의 길들 새로 깨어난 통증을 기억한다 비누 때문이었나 욕탕 가득 싱싱한 오이 냄새 공중목욕탕에서 늙은 여자들 시든 오이꽃 같은 젖꼭지 정성스레 닦는다 돌아앉아 밑을 씻는다 세세만년 이러했을 것이다 언제나 마지막까지 자세가 남는다 폐경의 어머니 아이 하나 낳아달라신다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문학동네 처용엘레지 - 허은실 여기 잠든 짐승 나의 이승이구나 그러나 본디..

한줄 詩 2018.06.08

이름 뒤에 숨은 것들 - 최광임

이름 뒤에 숨은 것들 - 최광임 그러니까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헤어짐에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오래 전 떠나온 이승의 유목민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가벼운 짐은 먼 길을 간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 없음은 다행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이유를 묻지 않고 달은 꽃이 지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제목들처럼 ..

한줄 詩 2018.06.08

시래기 - 육근상

시래기 - 육근상 바람벽에 시래기 타래 길게 늘어져 있다 물 기운 빠져 걷기 힘겨운 엄니 왼다리 같다 되똥거리며 해종일 다랑이 밭 일구고 콩잎 따고 수수목 꺾던 손등도 이제 장작 같구나 그 손에 자란 나도 장작 같아서 젖은 손등 문질러 온기 집어넣는데 얼마나 길게 연기 빼어 무는지 매운 눈물이 시래기 타래로 떨어져 바특하게 끓여놓은 찌개 같다 시래기 같은 몸으로 바람벽 기대어 엄니 보고 있자니 까치밥 파먹고 달아나는 새 떼처럼 나는 지금껏 엄니 파먹고 살아온 것 아니냐 물 기운 빠져나간 왼다리가 인두 자국처럼 붉다 *시집, 절창, 솔출판사 낙화 - 육근상 한마디도 없이 길다 다시 돌아가려니 가슴 먹먹해진다 초입에 쪼그리고 앉아 경배 중이신 엄니 다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일흔넷 되셨다 돌아가야지 ..

한줄 詩 2018.06.08

喪家는 아늑하다 - 김응교

喪家는 아늑하다 - 김응교 딱 한 번 전화로 통화했던 후덕한 고인의 영정 앞에 헌화한다 방 가득 둘러앉아 무거운 무게를 견디는 꺾인 표정들 비스듬히 노을빛 받아 귤빛으로 물든다 한 사람의 임신한 유부녀와 대여섯 총각들이 둘러앉아 상가인지도 잊은 채 탄생에 관해 얘기한다 한꺼번에 쌍둥이 낳으면 좋잖아? 지금 욕하는 거예요? 푸푸 웃으며 죽음과 친해진다 자정이 넘어 장기전에 돌입할 전사들만 남는다 웅크린 짐승마냥 귀가하는 먼 걸음들 샐녘까지 몇몇 문상객만 다녀가겠지 몇 패로 갈라 밤을 때우고 셀프서비스로 냉장고 속속 끄집어내며 똥배만 키우는 거북스런 보름달 매슥한 기억을 게우거나 신문지 뒤집어쓰고 뒤척이는 노곤하게 물러가는 어둠 기우뚱 졸고 있는 喪主의 등허리에 고인이 남긴 후일담이 어슴푸레 번져 오고 아기..

한줄 詩 2018.06.08

반짝임에 대하여 - 김선우

반짝임에 대하여 - 김선우 순천만 겨울 갈대숲 바람 속에 웅성거린다 가녀린 몸집의 도요새떼 갈대숲 가장자리 차가운 진펄에 내려서서 바람의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뼝대처럼 펼쳐진 북풍의 정면, 사소한 신음 한줄기 새어나오지 않는 민물도요 고요한 얼굴들 조그만 한뼘 키에 삼생(三生)을 눌러앉힌 면벽 나한들 같다 바람의 마음을 읽기 위해 오래 기다려온 입선(立禪)의 새떼 마침내 날아오른다 모든 각도에서 낱낱이 다르게 반짝이는 정면을 기억하는 측면의 날갯짓들, 순천만 한 허공이 갈꽃 무리처럼 반짝인다 저마다 다른 음역으로 바람을 허밍하는 갈대의 꿈을 부리에 물고 모두 다 다르게 읽은 바람의 마음속으로 비상!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 눈 그치고 잠깐 햇살 - 김선우 지저분한 강아지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한줄 詩 2018.06.08

다시 한 번 묻고 싶어도 - 김종수

다시 한 번 묻고 싶어도 - 김종수 한때는 뜬금없이 묻곤 했지요 날 진짜 사랑해? 한 발짝 디딜 때마다 디딘 곳이 사라지는 시간의 계단을 오르다 보니 이젠 삶 자체가 그런 언어를 잊어버렸군요 날 사랑해? 묻지 말아야 할 것 아무리 물어봐도 답이 없는 것 속 뻔한 질문이지만 이젠 왜 그 질문조차 잊혀지는 걸까요 생(生)의 바람이 쉼 없이 세월의 등을 떠미는 게 안타까워 다시 한 번 묻고 싶어도 그냥 가슴에 묻어야겠어요 그대를 아는 만큼만 안다는 건 결국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거겠지요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에 이토록 흔들리는 거 아니겠어요 *시집, 엄니와 데모꾼, 달아실 명절 테러범 - 김종수 처음엔 안 그랬는데 옛날엔 설렘도 있었는데 육십이라고 누구나 다 귀가 순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육십갑자 돌고 나니 명절..

한줄 詩 2018.06.08

그때 이후 - 김이하

그때 이후 - 김이하 그대의 눈을 보듯 목련을 바라본다 저 솜털 부숭부숭 한 꽃의 부리를 들여다보며 한참도 지난 겨울의 한 자리 찾는다 봄은 지척인데 무슨 소리냐고, 그러나 나는 이렇게 살았다 세월은 흐르는 것이기에 내 인생의 한 점은 언제나 불안하게 흔들리며 꺼져갔다 그리곤 어느 자리에서 주저 앉아 먼 하늘 바라보면, 문득 깜빡 잊었던 단지 속의 엿가락처럼 달콤하게 떠오르는 기억, 우리는 가끔 이런 걸로 살지 않는가? 정말 잘 나가던 시절도 정말 뜨겁던 시절도 정말 죽고싶던 시절도 다 잊혀가고, 아련한 한 가닥 아지랑이 같은 그 눈빛 찾아 시력을 잃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대의 눈을 보듯 목련을 바라본다 언젠가 화들짝 피어 있을 첫눈 같은 그대, 목련을 바라보면 언제나 그대의 눈에 가득 들어오던 첫눈 내리..

한줄 詩 2018.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