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개를 위한 변명 - 이동훈

개를 위한 변명 - 이동훈 먹지 못하면 개꽃, 반반치 못하면 개떡, 시원찮으면 개꿈이다. 어엿한 새끼도 개를 앞에 두고 욕을 보인다. 남의 족보를 허락 없이 가져가서 개망신 주는 꼴이니 개로서는 어처구니가어벗다 할밖에. 굴러먹다 온 개뼈다귀 출신이 개수작 부린다고, 개똥도 모르면서 병나발 개나발이라고 닦아세울 것 같으면 개구멍이 다 그립고, 있지도 않은 개뿔로 창피를 주니 개 낯짝도 붉어질 지경이다. 저들끼리 남남하다가 새판 짜고 이판사판 몰려 딴판 벌리더니 개판이란다. 죽 쒀서 개 준 꼴이란다. 개 말로 죽이라도 한 술 떴으면 덜 억울할까. 개소주 대러 개장수 나서는 인기척이 이보다 슬플까. 당겨진 개줄 같은 긴장이 이보다 싫을까. 털레털레 마을돌이 나설 때면 개나리 푸지게 늘어서서 개털끼리 좋은 봄이..

한줄 詩 2018.06.03

릴케와 장미와 - 이은심

릴케와 장미와 - 이은심 장미를 꽂았던 꽃병이 깨졌다 깨진 조각마다 사탄의 요염한 옆얼굴이 새겨져 있다 날마다 나는 잔걱정을 갈아주었을 뿐 멈춘 적 없는 그대 순수 속으로 한 뼘도 들어가지 못했다 늑골 아래, 수없이 돌아서며 많이 운 곳 한 덩이 주먹밥처럼 뜨겁게 뭉쳐있던 추억이 욱신거리며 흘러나가고 누가 나 몰래 나를 불 지펴 어느 하루 일 만 송이 황홀히 타오르던 4월 지나 6월 다만 지금 이윽히 날 저무는데 흩어진 아픔을 쓸어모아 내 한 때 뭉클했던 그 가슴으로 먼저 서 있으면 이 세상 아니듯 그대 그저 피기만 하라 스스로 베인 손을 감싸 안고 더욱 살아갈 무슨 이유가 있어 바닥을 치는가 이 눈부신 파편 무릅쓰고, 지상의 어디 한 군데인들 꽂힐 곳 없을 때 꽃은 진다 그러다가 지는 것조차 그친다 *..

한줄 詩 2018.06.03

우리 기쁜 절벽 - 서규정

우리 기쁜 절벽 - 서규정 서둘러 가는 것은 길이 아니라 도착이었다. 길가에 나온 사람들은 먼지 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끝이 없는 길 잘 가라고 인사는 건넸다. 어디선가 직각으로 꺾일 것 같은 길 위에서 무엇인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불고 덮였다. 꽃들이 피어났다. 사람들이 꽃처럼 피식피식 웃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지만 오래오래 덮이기를 바란다. 아직도 좁다. 성냥개비처럼 어둠 속에 갇혀 있다가 세상을 깜박 밝힌 죄로 스스로의 목을 매달고 처형된 불꽃, 무죄의 그늘이 흔들릴 때 숨어 있다 온 누리를 비치는 먼동이 되는 것. 아마 내일은, 땅은 쩡쩡한 햇빛에 의해 뜨거워졌으며 길들은 모두 활개를 치며 떠난다. 정오의 길은 늘어진 탓에 늦게 떠나지만 출발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기합 대신 고속도..

한줄 詩 2018.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