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살 맛 - 고증식

살 맛 - 고증식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맛있는 거나 좀 먹자고 장소 메뉴는 날더러 정하라는데 장소는 그렇다 치고 암만 뒤적거려도 맛있는 게 뭔지 땡기는 게 없으니 어디 사무치는 얼굴인들 있겠나 중학교 때 읍에 따라가 처음 먹어본 짜장면 한 그릇 개울 건너 약방집 은순이 고 가시내 하얀 얼굴만큼이나 삼삼하게 아른거리던 그 맛 어느 토요일 오후였던가 이십 리 타박타박 읍냇길 걸어 꿈같은 짜장 한 그릇에 날 저물어 돌아오기도 했는데 그런 집 어디 없나 몇 십리 자갈길 달려가 만나는 사무치는 그리움 하나 *시집, 하루만 더, 애지출판 내 친구 왕별 - 고증식 친구가 별을 달았다 한낮에도 빛나는 크고 우뚝한 별 그를 왕별이라 부르는 건 별밭에 내리는 출세가 부러워서는 아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붙어 다닌 것도 모..

한줄 詩 2018.06.11

연속극처럼 - 이규리

연속극처럼 - 이규리 베토벤 월광이 좍 깔리면 저 드라마 속 남녀는 이별하게 돼 있다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따지기 시작한다 누가 먼저 사랑한다 했으며 누가 먼저 헤어지자 했는지를, 차일 것 같으면 먼저 차라고 일러준 건 언니다, 그런 언니도 예외 없이 차였고 베토벤 월광이 깔릴 틈 없이 내 드라마도 종쳤다 홧김에 길섶 둥근 호박을 걷어찼다 데그르 굴러갈 줄 알았는데 움푹 패이더라, 하현이더라 드러나지 않을 뿐, 남녀는 만날 때부터 서로 파먹고 먹힌다 드라마가 특히 그렇다 비벼 치대는 동안은 모르겠지만, 엿기름도 가라앉고 나면 웃물만 쓴다 시작은 끝을 물어오고 하현이 가까워지면 다시 한번 베토벤 월광이 남녀의 분위기를 쓰윽 잡아준다 서로 날을 들키는 순간, 황급히 감추는 순간 하현이다. 자욱하게 하혈이다..

한줄 詩 2018.06.11

지구를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 독서 - 여태천

지구를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 독서 - 여태천 국경을 넘어가는 밤이다. 마지막일까. 밤은 또 바람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짧은 시간에 경계 위에서 우리의 얼굴은 변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무엇을 알고 싶은가. 잠시 동안 우리는 갈 곳을 잊기로 한다. 바람이 아침을 깨우고 팔을 뻗어 홀로 떠나는 불빛을 만진다. 나머지의 체온이 느껴진다. 오래 기대고 있었던 저 건물의 글씨 그 아래서 근심도 없이 내일이 왔다. 몇몇은 그랬다. 몇몇은 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렸지만 만약 우리의 말이 절실했다면 나머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분명 우리는 갈 곳을 잊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잊지 않고 바람은 또 분다. 노래가 홀로 떠나는 저 불빛을 지켜 줄 것이라고 위로하자. 밤은 또 바람과 함께 ..

한줄 詩 2018.06.11

중심축이 흔들린다 - 이상원

중심축이 흔들린다 - 이상원 내 몸의 중심축이 기울기 시작한다 오른쪽 왼쪽 조금씩 흔들리다 끝내 연시처럼 철벅 땅에 떨어진다. 포기하고 싶다 일어나지 말고 이대로 어둠으로 차단한 채 저 혼자 고요한 땅속으로 피난처럼 녹아들고 싶다. 머리를 드는 순간 허공은 그가 감춘 혼돈의 도깨비불로 번뜩일 것이다. 좌우로 번갈아 난타당한 내 몸은 일어서고 쓰러지기를 연신 반복하며 이력처럼 주름을 달아갈 것이다. 그래도 땅은 제게로 흘러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두꺼운 포장을 철갑처럼 두르고, 그저 가야 한다고 떠민다. 땅과 허공 사이 막막한 공간을 개미마냥 자세를 낮추고 소속도 모른 채 걸으며 마냥 흔들리는 중심축, 끝내 나는 헝클어진 주름 타래로 내던져질 것이다. *시집, 내 그림자 밟지 마라, 황금알 황당한 결론..

한줄 詩 2018.06.11

장이 서다 - 최정아

장이 서다 - 최정아 움직이는 자만이 살아 있다 땅속 어둠을 먹고 먼 모래밭 걸어와 난전을 여는 개미들 질끈 동인 허리에 삶이 있다고 풀밭은 물 좋은 바다일 뿐이라고 때론 날카로운 풀잎에 몸을 베어도 모래톱 펼쳐놓은 좌판에는 꽉 움켜쥔 먹이가 놓여 있다 통째로 끌고 가는 기나긴 행렬 도무지 틈이 없는 곳으로 길을 내는 개미들의 본능이 짓물렀다 나은 팔뚝의 흉터 같다 서로의 어깨 부딪치며 존재를 확인하는 개미들 대장간 망치소리도, 떨이를 외치는 어물전 할멈의 쉰 목소리에도 더워지는 장터 모래바람이 뜨겁다 *시집, 봄날의 한 호흡, 문학의전당 탐색하다 - 최정아 꼬마전구가 한 사람의 생애를 읽는다 입에서부터 항문까지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긴 통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엄마의 떡을 뺏던 호랑이가 ..

한줄 詩 2018.06.11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일 때까지 - 김태완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일 때까지 - 김태완 안녕, 청춘아 시를 쓴다고 깝죽대더니 궁색한 언어로 다른 놈들처럼 이빨로 나불대던 개 같은 이론, 시론, 사상론, 부르조아 그렇게 한 시절 보내더니 그래도 좋으냐, 이 병신아 시는 아무나 쓰냐 할 말은 한다고 나불대더니 무슨 말이나 하긴 했냐, 이 병신아 처먹고 잘 살 생각이나 하지 시가 너에게는 소중하다고 하겠지만 개 좆 같은 장난은 이제 끝났다 안녕, 청춘아 잘 가라, 눈물겹도록 고운 여자야 너를 끝내는 탐하지 못하고 원통하게 보내마 가라, 제발 가라, 썩은 청춘아 차마 강간도 하지 못하고 너를 보내마 안녕, 청춘아 이제는 영원히 보내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결코 자위행위도 하지 않으마 청춘은 끝났는데 좆같은 저쪽 후미진 골목 어귀에 미친년이 가랭이..

한줄 詩 2018.06.11

나의 역사 - 류흔

나의 역사 - 류흔 나는 나를 모색해왔으며 나로부터 역전될 수 없다 지난 사십여 년간 나는 낙후되었으며 그것은 매우 점진적이었다 타인이 보기에 나는 모든 면에서 덜 개발된 듯이 보였을 것이며 내가 아닌 나에 대해 꼭 집어 규정하기가 거시기한 그런 존재다 고생대 화석에도 나타나는데 나는 수억 년 전부터 고생스런 삶을 살도록 운명지어졌으며 한 사천 년 전에 한 번 천오백 년 전에 한 번 그리고 엊그제 한 번 이렇게 세 번 정도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 결정적으로 나의 빈곤은 완벽한 충만에서 비롯되었으며 지난 신생대에 잠시 신생의 삶을 살았듯이 나는 어떤 신비 속으로 나를 밀어넣고 싶다 붉은 입술 속으로 혀를 밀어넣듯 세월을 구애하거나, 구걸하는 나와는 다른 나의 시간을 포옹한다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갖는 비교적..

한줄 詩 2018.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