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홀로 마당에서 - 남덕현

홀로 마당에서 - 남덕현 -K에게 봄꽃 다 지고 초여름 비 그러나 여름꽃 아직 멀고 봄꽃 그림자마저 지는 슬픔만 남았습니다 풀빛 이토록 밝았던지요 달 없이도 환한 마당에서 아는 노래 벌써 다 부르고 이제 모르는 그리운 노래 쓸쓸히 홀로 지어 부릅니다 떠나온 사람보다 떠나보낸 이 많다 돌아올 사람보다 떠나갈 이 많다 바람에도 내가 두고 온 바람이 있어 유난히 서럽게 머리카락 나부끼며 스쳐 가듯이 나는 당신이 두고 간 사람 밤마다 낡은 허공의 탯줄을 끊고 나는 유성인 양 당신의 별자리를 유난히 반짝이며 스쳐 떨어집니다 몇 번 울고 웃은 것이 전부인데 벌써 우리가 헤어져 이승과 저승에서 늙습니다 하염도 없이 여념도 없이 우리가 따로 늙습니다 *시집/ 유랑/ 노마드북스 그리움.1 - 남덕현 마른 노을에 번개 치..

한줄 詩 2018.06.04

빛의 거리 - 김해동

빛의 거리 - 김해동 할머니는 사람이 죽으면 다른별에서 태어난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 별에서 살다가 죽으면 또 다른 별에서 태어나고 그렇게 수없이 죽어서 끝없이 태어나다 보면 우리의 영혼은 우주 끝가지 갈 수 있을까 빛은 1초 동안 지구를 7바퀴 반을 돈다고 한다 그 속도로 지구에서 달까지는 1초 조금 넘게 걸리고 태양까지는 500초 안드로메다 은하계에서 지구까지는 2백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니 무엇을 두려워하랴 아침마다 달려오는 이 빛이 2백만 년 전 안드로메다 자리에서 달려온 것이라면 안심하라 너의 죽음마저도 안심하라 천당과 지옥마저도 광활한 빛의 대지에 쏟아버리고 영원의 시간이 보내준 이 빛과 함께 무수한 영혼들이여 빛의 거리를 믿고 사랑하라 *시집, 비새, 종문화사 결혼식 - 김해동 성당에서는 ..

한줄 詩 2018.06.04

극락조 염전 - 최준

극락조 염전 - 최준 인부들이 잠들어 있는데 거품 파도를 일으키며 선풍기가 돌아간다 어디에도 바람은 보이지 않는데 소금 창고 그늘 찾아들어 소금자루 베고 잠든 인부들의 꿈속에서 극락조가 우는 한낮 주인공 없는 비극이다 소금을 먹지 않는 극락조는 숲 없는 바다에서 살지 않는다 적도를 오래도록 서성거리는 붉은 태양뿐 태양의 바다와 눈부신 개펄뿐 그늘 없는 극락이 어디 있다고 인부들이 버려 둔 삽날이 소금보다 더 반짝거린다 지난 우기의 천둥과 번개가 몸 도사리고 한낮을 이미 기운 그들의 삶이 저물어가듯 고집스럽게 선풍기가 돌아간다 인부들의 꿈 없는 극락조 없는 소금창고가 바다의 깊이로 넓어져 있다 바람이 분다 선풍기는 소금을 낳지 않는데 소라고동의 먼 휘파람 소리로 극락조가 울고 있다 극락조 은빛 울음만 눈부..

한줄 詩 2018.06.04

슬프다는 한마디가 목에 걸렸다 - 이기영

슬프다는 한마디가 목에 걸렸다 - 이기영 지붕 위 붉은 선인장 꽃은 며칠째 떨어지지 않았고 세상에 없는 이름으로 캄캄해져버린 안부만 왔다 예리한 가시를 키우던 선인장은 죽을힘을 다해 뾰족해지는 법을 물었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하얀 나비를 꽂은 소녀에게로 갔다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수직만을 고집했다 침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어서 더 아프다 꼿꼿한 가시 속에 숨겨놓은 손바닥만 한 잎보다도 꽃잎을 포기 못하는 선인장보다도 물어볼 수 없는 전갈인 너와 쓸 수 없는 답장인 나를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을까 이 계절과 저 계절의 경계에서는 언제나 계절보다 먼저 바람이 불고 비가 온다는 것을 비가 오면 가장 먼저 무릎이 시리다는 것을 지붕 위를 맴돌던 붉은 달이 소리 없이 졌다 *시집,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한줄 詩 2018.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