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보내지 못한 편지 - 김광수

보내지 못한 편지 - 김광수 너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배신하는 것이다 나의 사랑이란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 너를 사랑하는 천박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네가 미워서 너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너를 미워하지 않으면 내가 아프기 때문에 너를 미워하는 것이다 나의 사랑은 생존에 순행하는 것을 사랑이라 부르는 저열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너를 더 사랑하거나 내가 더 아픈 것이 차라리 사랑이려니 했다가 그러다가 나중에 너를 더 미워하게 될까 봐 그러면 네가 더 아플까 봐 *시집, 비슷비슷하게 길을 잃다, 문학과경계사 후회 - 김광수 내 몸이 아직 살아 있어 이마트에서 구두 한 켤레 사 신고 원추리 새싹 돋는 공원길 걷네 백목련 피어있고 진달래 피려하는 이 걷잡을 수 없는 봄에, 나는 발에 잘..

한줄 詩 2018.06.07

거꾸로 매달린 사람 - 박주하

거꾸로 매달린 사람 - 박주하 -tarot 1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겨울은 왔다 날린 눈보라가 입천장까지 들이치는데 심장을 뒤덮고 있는 열대야는 도무지 멎을 기색이 없다 열두 달을 거치고도 이르지 못한 집 열두 번의 죽음을 통과하면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너를 기만하며 채우려던 소망은 어느새 나를 기만하기 시작했고 생은 끝내 되돌려 받는 고통이 되고 있다 모든 기쁨과 슬픔이 전생과 내생이 늘 사소한 오해의 공식과 손잡고 있다고 聖木들 눈 깊도록 일러주던 말 나 미처 깨닫지 못했으니 잎사귀도 꽃잎도 없이 가지마다 붉은 참회를 품은 시간들은 모두 너에게로 가는 내 살과 피의 바탕이다 붉은 하늘로 걸어 나가 삶과 죽음의 혼례를 마치고 나는 한 그루 나무로 남으려 하는가 그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채 ..

한줄 詩 2018.06.07

그리운 뒤란 - 권덕하

그리운 뒤란 - 권덕하 내 몸에는 모른 체해 주는 뒤란 있어 눈물이 마음 놓을 수 있었다 낙수에 패인 자리 바라보는 일은 밀려난 풀만큼이나 자신을 달래는 일이었고 댓잎 만지작거리며 바람 쐬기도 하고 손톱만큼 자란 수정도 보고 숨겨둔 일 고백하듯 까만 꽃씨 받다가 텃밭으로 나가 지붕 내려다보며 고욤이 그렇듯 떫은 것도 풀덤불에 두어 그리운 것 되면 상강 지나도록 표해 놓은 삭정이만 봐도 좋았는데 뒤란 사라진 몸 정처 잃고 잦은 슬픔에 먹먹하다 금간 오지그릇처럼 철사로 동이고 싶은 마음 조금씩 뒤틀리고 붉은 혀 감출 데 없이 시드는 것도 꽃대궁의 일로만 남아 신경이 쓰이다 *시집, 생강 발가락, 애지 빈집 - 권덕하 집이 전화받고 싶을 때가 있다 의자나 식탁도 귀 기울이다 모서리 질 때 있다 혼자 살다 무너..

한줄 詩 2018.06.07

노인 - 김상철

노인 - 김상철 단걸음에 오를 인도 스무 걸음에 오르려나보다 택시는 문도 닫지 못하고 차도는 밀려 난감한 운전자들 본다, 임종을 지키는 눈으로 더러는 과거로 돌아가 활력 넘쳤던 팔다리를 생각하고 더러는 미래로 달려가 저들 앞길을 가늠하는데 삶은 회의적이거나 적어도 한숨이다 그렇다 노인은 십대가 이십대로 성장하고 이십대가 삼십대를 배워가고 그리고 또 오십대가 육십대로 늙어가듯 다음에 나 있는 길을 향해갈 뿐 지금 인도로 오르고 있는 한낮의 고요한 정물 저것은 떠나려는 비애가 아니라 생의 완성을 위해 타는 막바지 혼신의 정열이다 *시집, 흙이 도톰한 마당에 대한 기억, 고두미 4차선 도로를 건너는 아버지의 영상 - 김상철 초록 신호등이 점멸을 시작하자 멈춰 있던 자동차들이 흐를 태세를 갖추었다. 횡단은 아직..

한줄 詩 2018.06.06

매화목 - 이자규

매화목 - 이자규 마당에 매여 있는 병든 개의 신음이 하얀 눈발로 쌓여지던 겨울 비명처럼 다가드는 수묵으로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봄이 나를 잊었는가 싶었을 때 묶여 있는 자유보다 얼마나 큰 선물인가 노래 부르는 밤마다 내 안에서 울부짖던 짐승을 달래며 진눈깨비 아팠던 붉은 옹이마다 내 음계를 안고 그대에게로 가는 길 하르르 떨어지기 직전의 소리 없는 찰나 낙화의 전율을 빌려 푸르러지는 매실의 꿈 내 터질듯한 그리움으로 당신의 내부에 푸른 둥지를 틀 것입니다 *시집, 우물치는 여자, 황금알 개 - 이자규 고깃덩이로도 개를 달래진 못한다 갓 낳은 새끼들을 떼어놓자 살 맛 잃은 듯 허공 향해 낑낑거린다 하늘 밖과 땅 밑 떨어져 있어도 보이지 않는 끈 개새끼가 된 오늘 구십 년 살다 말라비틀어진 몸으로 스스로 ..

한줄 詩 2018.06.06

수선하러 갔다 - 천세진

수선하러 갔다 - 천세진 오랫동안 써왔던 가면에 금이 갔다 10년 이상을 잘도 버텨주었다 모두들 이 가면을 믿고 일을 맡기고 술잔을 나누었다 어떤 사내는 그의 비밀을 털어놓기도 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았는지 모른다 수선집 사내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늘 여분을 챙겨두세요. 가면에 금이 가는 상황은 빗방울만큼이나 많습니다. 수선은 낡은 것을 좀 더 유지시켜줄 뿐입니다. 소수의 취향일 뿐이지요. 수선이 제 직업이지만, 제 것 모두를 수선하지는 않습니다. 30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킨 비결이죠."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일정한 속도로 가면을 수선하고 있는 사내가 깨달음의 스승처럼 존경스러워졌다 가면이 수선되는 사이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를 지나던 형형색색 온갖 표정의 가면들이 팽팽한 긴장을 놓아버리..

한줄 詩 2018.06.06

바람이 나를 지나갈 때 - 유기택

바람이 나를 지나갈 때 - 유기택 바람 소리가 밤새 물소리 같아 무엇이 아니면서 자꾸 떠내려갔지 그래야 할 것 같았지 돌아누울 때마다 모서리가 배겼어 내가 그렇게 많은 모서리인 걸 알았어야 했을 것 같아 날 선 모서리들이 뭉그러지고 슬그머니 둥글어지고 있었던 거야 바람 소리가 잠을 끌고 다녔지 뭐가 자꾸 가슴팍께서 덜컥거렸어 *시집, 참 먼 말, 북인 뿌리들이 하는 거라곤 줄곧 - 유기택 가라앉은 막걸리 같은 데를 새끼손가락으로 휘저어보는 일 뿌옇게 들고일어나는 갑갑증을 무소식 대하듯 들여다보는 일 감감한 꽃 걸음마다 꼭, 그 흐린 델 찍어서 맛을 보고서야 직성을 푸는 일 허리께가 뻐근한 봄날마다 짐짓 허리 짚고 서서 하늘에다 대고 중얼거려보는 일 괜한 혼잣말도 자주 올려다보는 일 손닿지 않는 데가 더 ..

한줄 詩 2018.06.06

객실 열병 - 김익진

객실 열병 - 김익진 죽을 수 있도록 태어난 우리는 살아있는 한 헤어지는 중, 햇살에 휘감겨 부서지는 터치 빅뱅 후 몇 번의 클라이막스 오르가즘 후 남아 있는 것은 바람의 허밍과 주파수 바람은 우주의 교향곡 창가를 스치는 한순간의 삶은 딱 한번 반짝이는 울림 폐허가 되기 위해 세워진 도시에서 태어나 유령이 되기까지 우리는 객실 열병을 앓고 있다 순간의 만남과 헤어짐 속에 바람은 야생이고 베어지는 우주의 현이다 삶의 의미와 존재는 언제나 정밀하게 계산된 중력의 전략 마지막 터치로 부서지는 바람의 허밍과 주파수가 애도 없이 사라진다 *시집/ 기하학적 고독/ 문학의전당 소각된 상처 - 김익진 방아쇠를 당기기엔 너무 먼 과녁 꿈꾸는 차원의 한 단계 위에서 한 장씩 말하기엔 많은 사연이 있다 겉으론 평화로우나 소..

한줄 詩 2018.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