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름 뒤에 숨은 것들 - 최광임

마루안 2018. 6. 8. 22:19

 

 

이름 뒤에 숨은 것들 - 최광임


그러니까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헤어짐에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오래 전 떠나온 이승의 유목민
오던 길 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가벼운 짐은 먼 길을 간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 없음은 다행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이유를 묻지 않고
달은 꽃이 지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제목들처럼 집요하였더라면 지금쯤
이 밤이 휘영청 서러운 까닭을 알겠는가
꽃대궁마다 꽃 피고 꽃 지고, 수런수런
밤을 건너는 지금


*시집, 도요새 요리, 북인


 




달콤한 관 - 최광임


냉장고 옆 보자기에 싸인 단지 하나
덩그마니 놓여 있다
나무 상자 안 둥그스름한 도자기 속에
한 생애의 진액이 모셔져 있다
수많은 봄날과 꽃의 상처가 범벅된
달콤한 무덤


분분한 꽃가루
티끌 같은 시간으로 물어 날랐을 노동의 집
흔적도 없이 허물어진 빈 밀랍방에서
세상은 의지 밖에서 돌기도 하더라는 흘러간 노래같이
붕 붕 춘몽의 필름을 돌리며 잠 속으로 길 놓았을,
마른 꽃잎에 몸 뉘었을
허탈한 잠

그러고 보니 한 생애가
뼛가루 몇 줌으로 저 도자기 속에 모셔진다는 건
누가 누구에게로 흘러가는 일이다
가뭄의 논 같은 시간의 등을 지나
남겨진 사랑의 진액까지
세상 모든 물기의 슬픔을 담아내는 샘, 오늘도
누가 흐르고 있다




*自序

밥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떠돌았다.
연두에 초록을 채우는 일이었다.

나와 나의 시는 고고(苦孤)하여
많는 밤, 노래하며 춤을 추는 사이
십만 년 같은 세월이 펄럭였다.

겨우 한 생의 서막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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