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뇌물과 유서 - 허혜정

마루안 2018. 6. 8. 23:20

 

 

뇌물과 유서 - 허혜정


뇌물, 그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예약된 운명이 아니었던가
울컥 쓴물이 넘어와도
멀쩡하게 뭐든 갖다 바쳐온
이 비굴한 손가락을 짖이겨버리고 싶다
투덜투덜 내주던 유리컵도 내던져버리고 싶다

언제나 소파에 주저앉아
나의 피로를 잔인한 오락처럼 즐기던 얼굴
잘 하면 편의를 봐주겠노라는 느끼한 혓바닥
독거미처럼 거미줄을 치는 피곤한 호출
자존심을 통째로 요구당한 순간을
내 손은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짙은 코팅창이 달린 세단을 몰고 가는
평판 높은 그들을 커튼 뒤에서 지켜봤었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귓속말을 주고받는 정치꾼들처럼
조용히 의자를 바꿔앉고 힘을 틀어쥐는 걸

왜 세상은 코앞의 일만 빼고
거창한 뉴스만을 떠들어대는가
제 코앞에 흐르는 뇌물에 대해서는 입을 닦는가
그러나 세상은 내가 침묵하는 밥통이란 걸 안다
안전 하나를 보장받기 위해
전재산인 카메라를 잡혀둔 사람처럼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는 게 최선이었던 자리

하지만 오늘밤 뉴스는 재미있는 게 아니다
손톱자욱이 패이도록 주먹을 쥐고
새벽 다섯 시의 특검실에서
침묵 속으로 자폭해버린 사내
이제는 끝났다고 나도 빨간 인주로 지장을 찍을 때
오늘밤 나의 시는 오랜 침묵을 떠메가는 운구행렬이다


*시집, 적들을 위한 서정시, 문학세계사

 

 




망가진 계산대 - 허혜정


다른 식당들이 문을 닫아걸 시간에도
친절한 주인은 한사코 먹고 가라고 했다
마지막 야간강의의 피로를 싣고 오는 내게
여인은 번거로운 잡채요리, 향그러운 찻물까지 내왔다
막장까지 실파뿌리는 손끝에서 떠날 줄 몰랐다

하지만 그 밤, 계산대에 신문지를 펼쳐들고 앉아
유쾌한 너스레를 늘어놓던 주인장은
얼굴이 벌개져 주방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게 일하는 거야? 무슨 실수를 했었는지 변명을 주워대던 여자는
후텁지근한 증기를 쏟아내는 주방에서 언성을 높였다

내 참 기가 막혀서! 그럼 그건 참 잘하는 거네
여인은 시도 때도 없는 그의 낮잠을
듣기에도 민망한 호프집 사건까지 끌어들였다
내 맘이라고, 코웃음치며 주인장은
그제서야 어리둥절 일어나는
늦손님의 돈을 받았다

갑자기 여자는 주방에서 뛰쳐나왔다
내 돈 내놔! 대체 네 돈이 어디 있는데
여자의 손가락이 계산대 서랍에 닿기도 전에
재빨리 주인은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골 빠지게 먹여 살려왔더니 하는 소리 하고는!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갑자기 금고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젠 마주치기조차 지겹다는 눈빛으로
주인장의 턱에 침을 뱉었다. 차라리 미쳐!
주인은 기가 막히다는 듯 웃다 훌쩍 나가버렸다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내 통장에 꼬박꼬박 입금되는
자그만 돈을 나는 얼마나 사랑하는가
돌아보면 금고처럼 깨져버린 가슴들
서울의 어둠 속을 빠져나온 외로운 비명을 나는 듣는다




# 허혜정 시인은 1966년 경남 산청 출생으로 1987년 <한국문학> 신인작품상으로 듣단했다. 1995년 <현대시> 평론,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에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비 속에도 나비가 오나>, <적들을 위한 서정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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