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식탁의 목적, 냉장고 불빛 - 이승희

마루안 2018. 6. 9. 22:39



식탁의 목적, 냉장고 불빛 - 이승희



냉장고 문을 열고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이 연은 전부 한 줄)
아 하고 탄성을 지르기도 한다. 따뜻한 불빛들이 막 생겨나서 손등이 붉어지도록 쓸쓸한 저녁.
너 없이 나는 못 산다고 말을 하던 저녁처럼 흐릿해. 사각의 반찬통들이 얌전히 앉아 있는 골목, 그런 마을, 폭설이라도 내릴 것 같아서


당신은 앞을 향해
나는 뒤를 향해 헤엄친다
전력투구로 마주 보는 시간이 생겨난다


우린 다 같이 외로웠으므로
식탁의 감옥을 꿈꾸었을 뿐


어떤 삶은 돌아갈 길을 절벽으로 만들며 나아가고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앞을 향해
기울어진 틈에 서 있었을 뿐
식탁은 둥글고
당신은 여전히 앞을 향해 있고
나는 뒤를 향해 있다
식탁의 체위를 닮아가는 일은 슬픈 일이다



*시집,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문예중앙








패전 처리 투수 - 이승희



나는 그게 마음에 쏙 든다 지는 것에도 순서가 필요하다는 것 질 때까지 잘 지기 위해 남은 시간을 책임져야 하지 날마다 길어지고 연장되는 절망에도 놓을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담장 아래에 꽃을 심는 마음 같은 걸까 글러브 속에서 공을 만지는 손가락들이 설렌다 내가 지나온 모든 끝은 당겨쓴 나의 청춘들이어서 당신을 만나면 나는 이제 줄 게 없어서 공을 던진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대안도 갖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들로만 서 있다 갈색 약병 속에서 웅크린 여름, 그 속으로 흩어진 마음들 여기가 분명 끝이었는데 나는 또 어디로 밀려가나 이제 알아서 달아날 곳이 없어 다행이다 지금은 오직 한 끝 손가락 끝에서 날아간 공은 중심에서 늘 비껴간다 중심을 눈앞에 두고 떨어진다 땅바닥을 치고 간다 아무도 내 공을 치지 않는다 내가 원한 것은 이제 그만 끝내는 것 당신들에게 내가 졌다고 인정받는 것 이런 세상 따위는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게 하기 위해 여기 서 있다 보이는 끝이 자꾸만 멀어질 때 끝에 닿을 수 없어서 썩지도 못할 때 나는 아무도 죽이지 못한 채 혼자 죽어가는 사람 어떤 끝은 끝없이 연장된다 나의 전력투구는 그렇게 끝으로 던져지는 것 나는 이미 세상에 읽힌 기억이지만 견대낸 기억들이 둥글게 모여 하나의 공이 된다 모든 끝은 손가락 끝에서 시작되고 끝날 것이다 지는 건 두려운 게 아니라 우리가 닿아야 하는 시작 나는 다시 중심을 바라 본다 끝은 늘 중심에 있는 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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