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단비에게 - 조기조

단비에게 - 조기조 단비야 너도 크면 공장에 다니겠지 이 아빠처럼 단비야 너도 크면 사랑을 배우겠지 미움도 배우겠지 아빠가 남긴 못 다한 사랑 못 다한 미움 단비야 너도 크면 싸워야 할 일들이 많겠지 얼싸안고 기뻐 울 날도 많겠지 네 또래 세상이 오면 그땐 단비야 네 갈 길 앞만 보고 똑바로 가는 거다 뒤에서 자꾸 누가 불러도 아무리 그리운 것들이 불러도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지 마라 아빠처럼 돌기둥이 된다. *시집, 낡은 기계, 실천문학사 낡은 기계 - 조기조 눈구멍과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와 치아에 말라붙은 기름 자국 위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더 이상 돌지 않는 낡은 기계 철의 골격으로 신념이라기보다 천성으로 육중한 삶의 무게를 버티며 우주의 원리를 닮은 무한한 회전운동을 얻어내던 그러므로 삶은 원심력..

한줄 詩 2018.06.11

벽장 유감 - 박순호

벽장 유감 - 박순호 주술을 행했던 흔적처럼 음산하다 어둠을 모시고 있던 자리는 왜 하나같이 검은 얼룩이 득실거리는 걸까 잊고 지냈던 물건들 옆구리마다 오래된 지문이 묻어나온다 내 몸 안에도 벽장 하나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어둡고 무거울 리 없다 반 쪼가리 생각들이 출렁거리는 밀실이다 꿈꾸는 죽음에 대한 느낌은 사라졌지만 이제 죽음을 꿈꾼다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 수첩에 기록된 문장 한 줄이 놓아주지 않는다 '고통의 뼈다귀들이 모여 몽상하는 습한 벽장' 문득 벽장 안에 아버지의 유품이 잘 계시는지 궁금하다 *시집, 헛된 슬픔, 삶창 틈 - 박순호 엿보다, 비집다, 노리다와 같은 동사 앞에 곱게 단장한 단어를 골라 넣지 못하던 시절 불길하고 음침한 골짜기를 품속에 넣고 다니던 날카로운 날들..

한줄 詩 2018.06.11

함박꽃 한때 - 권영옥

함박꽃 한때 - 권영옥 아카시아 꽃이 젖내처럼 향기롭다. 무엇이 되고자 한때는 들에 핀 함박꽃이었다. 막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막 피고 싶었던 떄가 있었으니 그 막이란 말이 먼 산을 보고프던 기억의 향내란 것을 아카시아 꽃 뒤태를 본 후 알았다. 그것은 때 묻은 화관 위 그림 같은 것 반백에 찾아온 친구들의 수다를 보면서 한때가 섶머리 치며 오는 것도 아니고 민둥산에 흰 배를 드러내며 근육질 자랑하는 것도 아닌데 작은 것들마다 뿜어 올리는 제련의 기억들 찬연한! 생의 중반에서 돌아보는 충전제이다. *시집, 청빛 환상, 북인 회춘의 명약 - 권영옥 머리에 가려진 채 핏기 잃은 얼굴 하나 누워서 눈을 감거나 추억을 끄집어내어 되새김질하는 일은 김 할머니에게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3층 효 건물 담장..

한줄 詩 2018.06.11

고아(孤兒)가 아닌 나 - 이철경

고아(孤兒)가 아닌 나 - 이철경 과부에게 비릿한 탄식이 고름처럼 흘러나오듯 고아의 눈빛엔 움푹 팬 허기가 서려 있다 아..., 그 굶주림의 세월 살려달라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며 에티오피아 아이처럼 무엇이든 입구녕에 넣어야만 한다 환난 중에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성경의 고아는 여전히 버려져 있다 들판에 흔들리는 꽃처럼 세상은 그대를 그저 홀로 피어나라 버려둘 뿐이다 단지 기댈 수 있는 것은 태초에 모든 동물의 세포에 기입된 연민신경에 기대어 깃털이 돋아 하늘을 날아오를 때까지 더는 그대들이 슬퍼하거나 눈물짓지 않기를, 고아가 과부의 마음을 모르듯 고아가 아닌 내가 홀로 꽃 터지며 외롭다 말하는 그대를 어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시집, 단 한 명뿐인 세상의 모든 그녀, 북인 고아 하성자 ..

한줄 詩 2018.06.11

존엄한 밥그릇 - 강시현

존엄한 밥그릇 - 강시현 두려움을 꺾고 남은 것을 모두 걸었을 때 다른 하늘이 열리고 처음 보는 새는 날았다 처참히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전부를 걸고 싸우겠다는 결단이 있었을 때 몸서리치는 외로움이 전신과 일생을 훑고 밤을 관통해 지나갔다 늘 관찰되고 있었지만 스스로의 위엄을 버리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각오가 핏발선 눈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존(自尊)은 버려지지 않았고 세상의 웃음을 밀치고 지켜졌다 나를 팔지 않았음을 시대의 뼈에 새겨놓았다 나를 버렸을 때 진정한 내가 되었다 *시집, 태양의 외눈, 리토피아 밥그릇 2 - 강시현 머리를 감고 털다보면 흰머리가 더 많아졌다 주름살에 걸려 넘어지는 머리카락도 있다 몰래 묘자리를 보러 산에 오르는 것도 혼자가 편해졌다 기다림보다 가슴이 먼저 먹먹해..

한줄 詩 2018.06.11

실락원 - 김미옥

실락원 - 김미옥 요즘 아픈 엄마를 실락원에 버리고 오는 꿈을 자주 꾼다 이름표를 감쪽같이 떼고 버린 죄책감을 드라이기로 싹싹 말리고 있는데 물고기처럼 눈알만 부풀어 오른 엄마가 오도카니 바라보고 있다 이미 버려질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깜짝 놀라 깨어 베개에 숨 고르기 한다 나는 엄마 코에 손을 대본다 '여우야 여우야 죽었니 살았니' 고리짝 같은 얼굴에 대고 속삭인다 엄마는 아이를 또 낳으려는지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배는 북장구만 하다 아버지가 좋아했던 손톱에 물을 들일 땐 여자였고 옹알이 섞인 잠꼬대를 할 땐 아이 같다 먼 훗날 내가 지금의 엄마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자장가를 부를 수 있을까 누가 나를 실락원에 버려줄 것인가 지난밤 끔찍했던 꿈을 숨기고 호로록 날아갈 거 같은 엄마 손에 지폐 ..

한줄 詩 2018.06.11

내 영토는 이동중 - 강신애

내 영토는 이동중 - 강신애 봄비 내리는 날 이사갈 집 둘러보았습니다 내 속에 일산화탄소 가득하여 몇날 며칠 헤매다 고른 방 하나, 거기 그토록 오래 꿈꿔온 숲이 마을을 양파처럼 감싸고 넓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실제의 숲은 상상의 숲보다 어질고 장엄하여 젖은 음계로 걸어온 나를 겹겹이 안아주었습니다 숲을 바라보는 마음 절로 붕대 풀려 다복솔에 감긴 안개가 마른 육신을 다복다복 채우고 낯선 배우의 暗行, 입부리를 벌리고 바라보던 박새 한 마리 서둘러 상수리나무 뒤로 퇴장합니다 걷거나 잠들 때에도 귓바퀴를 지잉 울리는 숲의 이명을 마음 어둔 헛간에 못질해 놓고 어떤 드문 시간이 나를 데려다주기만을 바라왔던 나날들 이제 상상의 숲에 갇힌 나의 사랑 끝내야 할 때, 굽이치는 수맥의 광기를 밟고 선 숲의 저 그윽한..

한줄 詩 2018.06.11

귀를 만들어 달아 드리다 - 김선향

귀를 만들어 달아 드리다 - 김선향 두루마리 베고 모로 누워 를 보시는 어머니 운다고 옛 사랑이 오리요만은- 아이들과 어머니를 번갈아 가며 부채질하다가 난생 처음 찬찬히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귀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내 어머니 박복(薄福)의 기원이란 못난 저 놈의 귀 때문이렸다! 면도칼로 귀를 도려내 베란다 밖으로 냅다 던져 버리고 햅쌀을 빻아 송편을 빚듯 귀를 만든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빛이- 어여쁜 귀 한 쌍을 양 쪽에 달아 드리니 그럴 듯, 그럴 듯해 선잠을 자던 어머니 마음에 드시는지 희미하게 웃으시네 물새 우는 고요한 강 언덕에- *시집, 여자의 정면, 실천문학사 은백색의, 아니아니 누런, 노파들 - 김선향 생선 가운데 토막을 건져 넌지시 아들 국그릇에 넣고는 생선대가리를 쭉쭉 빨아..

한줄 詩 2018.06.11

느림에 묶이다 - 이강산

느림에 묶이다 - 이강산 장돌뱅이 톱장수 아버지 따라 코 흘리며 첫발 딛곤 느릿느릿 걷다보니 아직 오일장 장터 가짜 순대 가짜 좀약 가짜 비너스브라자 가짜 세월의 난장판 그 틈바구니, 닷새 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막걸리 한 대접으로 끝나냐, 종점다방이라도 가야지 생강들, 간고등어들, 내 손목 끌어당긴다 흉금 털자는 듯, 이대로 작파하자는 듯 시장 바닥에 주저앉는다 누가 누구를 앞서 걸은 적 없는 방물장수태극기 마른멸치 논산순대 봄똥 참나무괭이자루 늘어선 그대로 뒤뚱뒤뚱 따라만 가는 강씨 임씨 마산댁 뻥구네 아랑이엄마 평국이삼촌 너나없이 뽕짝처럼 흘러가는 파장, 느려터지게 살아서 회갑도 못 맞은 큰누님, 서른댓 명은 지나쳐야 은근슬쩍 장터를 벗어나는, *시집, 모항, 실천문학사 모항(母港) - 이강산 바다는..

한줄 詩 2018.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