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신전에 날이 저문다 - 허연

마루안 2018. 8. 1. 19:39



신전에 날이 저문다 - 허연



살면 살수록
과학자들의 말은 맞아떨어진다
영원히 살 수 없으니까 사랑을 하는 거다
따지고 보면
기껏 유전자나 남기고자 하는 일이다


비극은
피하고 싶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데 있다


어쨌든
기억에서조차 사라지는 게
사랑이다 보니
사람들은 무엇인가 쓰기 시작했다


신전 기둥에 남긴 사랑도
그저 기록일 뿐이다


겁내지 말라고
내가 다 기록해놨다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라고
남자는 외치지만
여자는 죽어간다
신전은 세워지고 있지만 여자는 여전히 죽어간다


죽어가는 여자보다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남자가
진화상으론 하수다


남자가 세운 신전에 날이 저문다
언젠가는 벽화도 흐려질 것이다



*시집, 내가 원하는 천사, 문학과지성








별어곡 - 허연



그대의 날들은 길어서 홍적세의 긴 틈새를 지나 오늘도 남아 있네. 저 아프게 날선, 서리 내리는 날. 끝도 없는 기다림은 언제까지인지.


이루지 못한 것을 기억하는 새들은 오늘도 서쪽으로 날아가고, 그대 세월에 갇혀 오지 못하는 꿈에서 간신히 깨어


덜컹대는 이번 세기의 기차 속에서 수십만 년의 그리움으로 남은 그대 어디로 실려 가는지. 실려 가는 그곳에서 그때 그 노래를 부를 수는 있는 건지


노래로 늙어갈 줄 알았다면 그 말의 무늬와 바람의 색깔과, 차가운 새벽의 냄새를 기억해놓았을 텐데


밤이 오고 또 밤이 가는데. 견디는 모든 것들은 화석이 되고 새들은 또 날고. 오늘 아침 철로변에서 그리움은 서리로 내리고 또 그대는 견디기만 하라 하고


그대의 날들은 너무 길고 길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