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껍질 속의 고리 끊기 - 김정수

껍질 속의 고리 끊기 - 김정수 숨 넘어갈 듯한 기침 소리에 먼지 머금은 세월이 울꺽 올라왔다. 쓰레기통 비워 배 채운 식구들 비누처럼 깨끗했지만 하늘엔 그물이 많았다. 아무리 펼쳐도 새끼손톱만한 웃음조차 걸리지 않는 깨진 창이, 몰려오던 환한 아침을 찢었다. 집안은 늘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평생 굽은 허리 펴지 못하고 살았건만 늦은 귀가 때마다 한참을 대문 앞에서 망설여야만 했다. 가로등은 왜 그리 밝은지 물 머금은 돌멩이라도 던져, 몸 감추고 싶었다. 비록 산동네 판잣집에 살망정 세상은 바로 보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이 기울어져 있었다. 가로등 아래 서 있던 리어카는 폐차 된 지 오래. 골목에 쓰레기가 넘쳐났지만 이미 그의 몫은 아니었다. 병원 한번 가보지 못한 채 그가 죽자 멍든 계란을 깨뜨렸다...

한줄 詩 2018.07.19

24시 편의점 - 김태완

24시 편의점 - 김태완 편의점 불빛이 유난히 밝다. 영업이 끝난 주변 상가의 내려진 셔터문이 피곤한 몸으로 누워 굶주린 야생고양이의 월담을 경계하는 동안 무심한 어둠은 눈을 감는다 허기진 도심의 조명이 밤을 품어내는 시각 구석진 곳에는 늘 분노의 흔적이 쌓이고 깨진 유리병이 누군가의 가슴을 찢었나보다 참을성 없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밝아올 내일을 무자비하게 씹다 내뱉은 흔적은 누군가의 귀가길에 한 번 더 밟힌다 편의점 불빛이 유난히 밝다 다행이다. 불빛이 있어서 홀로 어둠을 피해 나오는 젊은 여자가 편의점에 들러 공연히 음료 하나를 계산하고 문밖을 한참동안 바라본다 편의점 감시카메라가 붉은 눈으로 젊은 여자를 암기한다 멀리 고성이 오가는 소리가 멀어질수록 젊은 여자의 집은 가까울 것이다 매일매일 불야성 ..

한줄 詩 2018.07.18

낙타의 여정 - 백성민

낙타의 여정 - 백성민 고삐 쥔 손이 흔들릴 때마다 두려웠다 푸른 초원이 신기루라고 모두 손 사래질 할 때도 목숨 하나씩 담고 건너야 하는 고비사막 난생 처음 등에 맨 혹 하나 떼어 녹슬어 무딘 칼로 열십자 길을 낸다 사막의 모래폭풍은 잠시의 길마저 지워버리고 돌아나갈 길마저 잃어버린 이곳은 툰드라의 고원 어느 편협한 사상의 절름발이가 이 낯선 곳을 찾아올까만 바람은 태고의 몸짓으로 생명의 씨앗을 실어 나르고 단단한 가시로 잎을 틔운 천형의 그림자만 냉엄한 햇볕 아래 꿋꿋하다 전설로만 남은 65센티미터의 거대한 족적은 전설보다 긴 이야기일 뿐, 타클라마의 무덤은 생명을 위해 준비된 마지막 여행지다 *시집, 워킹 푸어, 고요아침 4-19호 혜미의 빈방 - 백성민 사내의 손길이 잃어버린 것을 찾는 듯 조급했..

한줄 詩 2018.07.18

일어나 맨 처음 바라보는 쪽 - 박구경

일어나 맨 처음 바라보는 쪽 - 박구경 참새소리 일일이 빛나니 까만 동백기름에 비녀를 곱게 찌른 조모 떡이 나오거든 사촌들 오촌 당숙들에게까지 빠짐없이 돌리라며 어린 아버지 어머니 손을 잡고 방앗간 앞에 계시던 곳 내가 돌아가야 할 곳 지리산 아이들이 늙은 내 손을 잡고 출렁출렁 손자 손녀들이 뒤를 따르는 가운데 바라보던 곳 지리산 쪽 바라보는 남해 바다인가 참새소리 일일이 지저귀는 이 때 저 때 *시집, 국수를 닮은 이야기, 애지 단상 - 박구경 어떤 때... 가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뜨거웠지 눈에 쌓인 지리산... 눈에 시린 덕유산을 멀리서 바라볼 때 천 리를 달려 서울시청 광장에 가 이 나라 이름을 외쳐 부르다가... 마른 장작처럼 죽어가는 어머니... 괜히 엄마가 불쌍할 때 하야! 탄핵! 다시 광..

한줄 詩 2018.07.18

꽃으로 돌아갈 길을 잃다 - 이태관

꽃으로 돌아갈 길을 잃다 - 이태관 그녀가 사는 곳은 비비새 우는 화원 수많은 꽃들 무덤으로 피어 이만큼 살아 왔으니 축하해... 목 잘린 꽃의 향기는 지독하다 날마다 새로이 쌓이는 죽음 떨어진 꽃들로 세상은 아름다워 다시 또 한 광주리의 꽃들이 실려 오고 화원은 꽃들의 미로 꽃으로 살아 갈 길을 잃는다 남은 시간을 위해 꽃의 줄기는 불 태워지고 이름 모를 약물에 취해 흙으로 돌아갈 길을 잃는다 화원은 꽃들의 무덤 화려한 만큼 그 무덤 깊어져 가고 기억하는지, 초가을 햇살 아래 무덤 위해 피어난 노란 원추리 꽃 하나 *시집, 저리도 붉은 기억, 천년의시작 대추나무골 - 이태관 =파라호에서 앞산의 이마가 사립문 울타리를 들추고 밤새 안녕하신가 문안인사 여쭈면 집도 절도 없이 가난에 의지해 살아 온 세월 노..

한줄 詩 2018.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