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버려진 인형 - 박순호

마루안 2018. 7. 31. 21:52

 

 

버려진 인형 - 박순호

 

 

계집아이가 전봇대 아래 인형을 버리고 홱 돌아선다

늘 곁에 두어 눈도 맞추고 함께 잠도 잤을 인형의 눈이 외눈박이다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닫아 버린 대문 앞

누군가 입술에서 뽑아 던진 담배꽁초가 향처럼 타들어 간다

어제는 아비가 누군지도 모를 갓난아이를 내다버리고

오늘은 노망난 모친을 내다 버리려는 궁리 속에

대문은 불온한 제상(祭床)으로 눕혀진다

분리수거함에는 몇 백 년을 두고 썩지 못할 기억들이 수북하고

내장 같은 골목 구석구석에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듯이 봉해진 크고 작은 쓰레기 종량제 봉지들이 엎드려 있다

저 충만하게 채워진 골목의 그늘을 싣고 후진하는 쓰레기차 꽁무니에서 울리는 엘리제를 위하여,,,,

언젠가부터 버림받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독주곡이 되어버렸다

골목으로 접어드는 애인의 손에는 싱싱한 생선과 야채와 꽃들로 가득하다

버려질 것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거나 뒤로 미루는 저녁

상심한 마음은 어떻게 분리수거를 해서 버려야하는 걸까

외등 아래 외눈박이 인형이 웃고 있다

 

 

*시집, 무전을 받다, 종려나무

 

 

 

 

 

 

따먹다 - 박순호


나는 '따는' 법을 의미 있게 배우거나 가르친 적이 없다
이를테면 병따개 없이도 맥주병 뚜껑을 곧잘 딴다거나
식칼을 사용해 통조림이 안고 있는 과육이나 속살을 빼먹는다든가
걸맞는 도구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일
때로 먹는다는 것은 교양과 체면을 우적우적 씹어 삼키는 게걸스러운 입이 된다

들길을 걷는다
까마중 열매와 며느리밑씻개 잎을 따먹으며 희희덕거렸던 유년
그 기억을 따라 입속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본다
먹을 거리가 넘쳐나는 세상, 나의 혀는 그 시절의 입맛을 잃었지만
습관처럼 들에서 만나는 식물을 보면 죄다 따먹고 싶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나 지금이나 따서 먹는 일은 산목숨의 외로움과 허기를 위로해준다

그러나 정말 한 번은 따먹고 싶었던 여자
사랑을 알지 못한 채 따먹을 궁리에 애를 태웠던 여자가 문득 생각난다
사람들은 따먹거나 따먹히거나하면서 피안에 이르는 걸까
따먹는 일이 누추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 박순호 시인은 1973년 전북 고창 출생으로 2001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무전을 받다>, <헛된 슬픔>, <승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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