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앉은뱅이 장씨 - 이강산

앉은뱅이 장씨 - 이강산 -六場3 시장통 빠져나가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오늘도 한 바퀴 돌고서야 해 떨어졌다 다섯 갠가 여섯 개 좀약 팔았고 장꾼들 틈바구니 멀찍이 막국수 한 그릇에 허기만 채웠다 참빗이며 좀약 바늘쌈 좌판을 끌며 서른 살도 넘겼으니 벌써 한평생 없는 다리 대신 두 팔로 기어다니다 보면 생선골목 채소전 상포사 순대집 장터 사람들 모두 밥 대신 막국수로 살아가고 있구나 좌판 곁에 쭈그리고 앉아 나처럼 다리 대신 팔로 살아가는구나 좋다는 오일장 두루 돌아 파장 무렵 돌아갈 때면 나처럼 눈물 대신 흘러간 뽕짝도 쏟는구나 아랫도리의 고무튜브를 쿡쿡 찔러오는 한기에 떨다 보면 알겠구나 이백 원 삼백 원 남기는 기쁨으로 장터에서 한평생 늙어가는 사람들 시장바닥을 기다 보면 알겠구나 *시집, 세상의 아..

한줄 詩 2018.07.17

종점 다방 - 김수우

종점 다방 - 김수우 한 모퉁이에서 화초가 말라 가고 또 한쪽에는 프라스틱 꽃나무 무성하다 날마다 틀어놓은 때묻은 노래로 비어 가는 생의 앞뜰 천식환자로 늙어 버린 시계가 가르릉가르릉 흠집 많은 하루를 밀고 가는데 문득, 창 밖은 목련이다 불시에 달려온 듯, 숨찬 그리움, 한순간 바람 안고 뚝뚝 떨어진다 놀라워라 땅에 내려앉는 법 치열해라 미련을 버리는 힘 그 옆에서 나는 앞발가락을 편 채 나자빠졌던 시장통 구석의 생쥐 죽음과 난 상관없음을, 아무 관계도 아님을 중얼거린다 노래에 열중한다 심심하다 지친 비너스 석고상 뒤로 목련이 지는 변두리다방 여기저기 긁힌 탁자 위에서 내 모든, 모든 추억은 고요하다 *시집,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시와시학사 여기야, 여기 있어 - 김수우 15촉 알전구로 흔들리던 ..

한줄 詩 2018.07.15

한밤에 늙은 남자의 얼굴을 닦다 - 김선향

한밤에 늙은 남자의 얼굴을 닦다 - 김선향 깊은 밤 좁은 집안을 서성이다 보면 어느새 선반의 놋그릇 앞에 서 있게 되지 머지않아 아버지의 유품이 될 저것 유기(鍮器)를 만들었던 아버지 가볍고도 반짝거리는 스뎅그릇에 단박에 무너지셨지 노름빚에 떠밀려 알코올에 치여 맥을 못 추시더니 마침내 벼랑 끝에 홀로 쓰러져 있는 한 남자 놋그릇 안쪽을 문지르고 문지른다 아버지에게 품었던 오래된 독(毒)이 걷히고 은은한 윤이 감돌기 시작하면 터널을 밝힐 등불이 켜질 것만 같아서 이 밤 늙은 남자의 얼굴을 닦는다 *시집, 여자의 정면, 실천문학사 감나무 - 김선향 학교에서 돌아와 노란 맨드라미처럼 무료할 땐 감나무를 오르는 일밖에 반질거리는 이파리 사이로 고갯배가 뜨고 아버지가 커다란 손을 흔드시더라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한줄 詩 2018.07.15

해변의 길손 - 김유석

해변의 길손 - 김유석 저 폐허 격포에 가지, 뻔한 말, 뻔한 사랑, 뻔한 세월에 아직도 고동처럼 울어줄 줄 아는 사람 만나 그래, 불륜인 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무너지고 싶어. 격정은 사라지고 막연히 바랄 섬도 없네. 그저 수평선을 어루는 자잔한 물결로 적막한 서로의 몸을 적셔가며 이제 한때라 말해도 될 모든 것들, 제 깊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들의 손을 그만 놓아버리고 싶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지켜온 오랜 망설임보다 썰물 끝에서 견디는 한순간의 미늘 같은 허무가 절정도 없이 걷어내는 삶의 거품들 속에 한참이나 등 맞댄 채 누워 있고 싶어. 뻔한 말을 중얼거린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자해인가, 그리고 뻔한 세월에 속아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무심히 밀고 당기는 물의 단애 앞에서 흘렀고..

한줄 詩 2018.07.15

미리 써본 유언 - 김상철

미리 써본 유언 - 김상철 내 죽거든 너희 형제만 모여 가장 싼 수의로 염하고 가장 얇은 관에 담아 앞산 밭머리 석자 깊이로 묻어라 입회인으로 마을이장이면 족하다 여러 사람이 문턱을 드나드는 번거로움을 없게 할지니 삼일도 길다 하루면 족하고 밤에는 불을 꺼라 봉분도 평토로 하고 십년이 지나면 풀도 깎지 말고 묵혀라 아침을 먹고 지게를 둘러메고 산에 들던 그 일상의 습성대로 진실로 너희와 이별하고 산의 품에 들라니 *시집, 흙이 도톰한 마당에 대한 기억, 고두미 밥상 풍경 - 김상철 네 살 녀석이 밥을 떠 넣고 한 살 녀석이 옹알거리며 오누이 하는 모습 그늘을 돌아 들어온 밝음이 이부자리 온기와 어울려 엮어낸 아침 창가의 실루엣 넥타이를 묶던 손이 출근의 초바늘을 멈추고 거울 속으로 아내를 불러 저 그림 ..

한줄 詩 2018.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