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치매 병동의 여름날 - 최세라

마루안 2018. 8. 1. 19:15

 

 

치매 병동의 여름날 - 최세라


어제의 구겨진 낮은 스팀을 뿜는 병상처럼
처음 보는 얼굴로 아스라히 퍼진다

허리를 굽혀 몇 번씩 인사하던 바람이
귀퉁이가 접힌 채 병동 안을 들여다보고
여기서 떼는 발자국은 언제나 초행

태(胎)벽에 어룽진 저의 내세를 보는 뱃속 아이처럼
여러 번 소개된 말들이 다시금 번복된다

순간순간 지워지는 기억들이 칼싸움하는
설형문자다, 저 기하의 주름살들은

물밑으로 친밀한 당신들, 한 사람의 주름 위로
또 한 사람의 발바닥이 포개지고

귀가 커지는 순간 입술이 쪼그라드는 순간마다
혀를 길게 내밀며 배냇짓한다
이 없는 잇몸을 드러낸 웃음으로
귀퉁이에 붙은 개밥바리기 같은,
기억을 쪼그라뜨린다

처음을 꼭 쥐고 있는 갓난아기의 손바닥에

당신들의 무더운 한때가 웃으며 굴러다니는 것은

낯익은 자에게 첫인사를 전하는 사람으로부터
태고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시집, 복화술사의 거리, 문학의전당

 

 

 




왼쪽으로 돌아누우면 - 최세라


심장이 바닥을 친다

눅눅한 장판 아래로 피 흐르다 벽을 타고 올라와

꽃무늬 그린다 길고 짧은 꽃대들이 스위치를
껐다 켠다 인중이 깨어진 꽃들
이진법의 신호를 타전한다

하나 아니면 전무

지독한 이분법의 공식으로 당신은
자목련빛 눈을 뜬다
죽음이

 

택배로 왔다 밤새도록 타전되는 당신에 대한 풍문으로 정강이를 무릎을 어깨를 삼킨다 검은 관이 열리는 나무 밑에서 아찔한 눈빛을 삼킨다 이제 까마득해지는 얼굴을 삼켜야 할 땐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나 나는 새의 표절이고 절묘한 부분만 베낀 모방이고

 

당신으로부터 당신까지 이어지는 유서 깊은 역사와

관이 열린 틈 압핀처럼 쏟아지는 소나기까지
언 꽃을 벽에 치듯 떠나보내야 한다

다시 왼쪽으로 돌아눕는다
바닥 가득 일렁이는 당신을 본다

 

 

 

 

# 최세라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2011년 <시와반시> 신인상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복화술사의 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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