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사과와 잔 그리고 주전자가 있는 정물 - 김성규

마루안 2018. 8. 2. 22:03



사과와 잔 그리고 주전자가 있는 정물 - 김성규



전기밥솥의 밥을 젓고 식탁에 앉아

늦은 저녁을 먹는다

정물화가 벽에 붙어 있다

몇년 전 누나가 붙여놓고 간 정물화


사과와 잔 그리고 주전자가 올려진 식탁

그림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새어나온다

창문은 새둥지처럼 뚫려 있고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주앉아 웃고 있다

뚝배기에서는 찌개가 끓고 있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울까

장작이 타들어가며 웃음소리를 낸다

정물화 아래 다시 누나가 붙여놓고 간 스티커

좋은 생각만 하는 우리 집

조그만 글씨를 가리키며 웃고 있는 식구들 

못생긴 사과와 잔 그리고

창문에서 쏟아져나오는 웃음소리를 엿들으며

굴뚝에는 늙고 뚱뚱한 노인이 졸고

아이는 눈을 가리고 선물을 기다린다

주전자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싱크대에 쌓인 그릇들이 미끌어지는 소리


누군가 초인종을 누를 것 같아

먹던 밥그릇에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것 같은

한없이 어둡고 푸른 창문을 바라보며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창비








난파선 - 김성규



그러나,로 시작되는 문장을 쓰지 않기 위해

새벽마다 달력의 날짜를 지웠다

길은 온몸을 꼬며 하늘로 기어가고

벌판을 지우는 눈보라

빈집의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

뿌리에 창을 감추지 않고 어떻게 잠들 수 있겠는가

흙덩이 같은 어둠을 매단 후박나무가

내 뒤를 따라 벌판을 걸어온다

창문이 꾸역꾸역 눈덩이를 삼킨다

잔뜩 웅크린 지붕 아래 고개를 숙이고

불빛에 시린 손을 말린다

벌판을 몰아치는 눈송이

짐승은 어떻게 눈보라 속에서 길을 찾는가

수많은 가위표로 그어진

달력은 더이상 좌표를 묻지 않는다

후박나무가 다가와 뿌리로 내 몸을 감싼다

조금씩 하늘을 찢어내며 날아가는 쇠기러기

허기진 공룡의 뱃속 같은 땅을 찾고 있다

눈보라가 사방에 거대한 벽을 만든다

북극으로 날개를 펴는 눈보라

눈을 감고 공중에 빈손을 흔든다






# 김성규 시인은 1977년 충북 옥천 출생으로 명지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너는 잘못 날아왔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가 있다.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